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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는 지금 어디에 있나

글모음(writings)/토막이야기

by 굴재사람 2011. 7. 18.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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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는 지금 어디에 있나

 

 

중국의 백장(百丈·720~814) 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도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말로 유명하죠.

하루는 그에게 젊은 스님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스님, 부처는 어디에 있습니까?”(젊은 스님)
“이놈아, 너는 소를 타고서 소를 찾고 있느냐.”(백장 선사)
“만약 소를 찾으면 그 다음에는 어찌할까요?”(젊은 스님)
“소를 탔으면 갈 길을 가야지. 왜 머뭇거리느냐.”(백장 선사)
“그럼 그 소를 어떻게 간직할까요?”(젊은 스님)
“소가 남의 밭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라. 그게 목동이 할 일이다.”(백장 선사)
이 말을 들은 젊은 스님은 벌떡 일어났죠.

그러더니 백장 선사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 치며 법당을 나갔죠.

“내 소가 백장 밭에 들어간다! 내 소가 백장 밭에 들어간다!”

 

-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

 

 

*불교에선 ‘깨달음’이나 ‘부처’를 ‘소’에 비유하죠.

사찰 법당의 벽에도 ‘십우도(十牛圖)’를 그려 놓잖아요.

 

‘십우도’의 첫 그림, 기억나세요?

소는 없고, 끊어진 고삐만 손에 든 동자의 모습이죠.

왜 ‘끊어진 고삐’일까요. 그렇습니다.

본래는 ‘나의 소’였다는 얘기죠.

결국 부처가 부처를 찾는 격이죠.

그게 “부처가 어디에 있습니까”란 젊은 스님의 첫 물음에 대한 답이겠죠.

 

다음 그림을 볼까요.

이리저리 헤매던 동자는 결국 ‘소’를 발견하죠.

그리고 고삐를 걸어 씨름을 합니다.

끌고 가기가 쉽지 않죠. 왜냐고요?

그 소가 바로 ‘나’거든요.

세상에 ‘나’보다 힘겨운 상대가 있을까요.

힘찬 앞발은 ‘나의 집착’이고, 거센 두 뿔은 ‘나의 욕망’이죠.

씨름을 거듭하던 동자는 결국 고삐를 놓아 버리죠.

그 순간 뒷걸음질만 치던 ‘소’가 동자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니 ‘소’를 놓아야 ‘진짜 소’를 찾겠네요.

‘나’를 놓아야 ‘진아(眞我)’를 찾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소’를 찾으면 어찌할까요.

백장 선사는 “갈 길을 가라”고 합니다. 그게 어떤 길일까요.

바로 ‘소’가 흐르는 길이겠죠.

그런데 젊은 스님이 또 묻습니다.

“그 소(부처)를 어떻게 간직할까요?” 그는 아는 거죠.

‘소’를 한번 봤다고, ‘소’를 한번 탔다고, ‘소의 길=나의 길’이 되는 게 아님을 말이죠.

‘돈오돈수(頓悟頓修)’니, ‘돈오점수(頓悟漸修)’니 하는 불교계의 논쟁도 이 연장선 상에 있는 거겠죠.

 

백장 선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소가 남의 밭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라.” 그럼 ‘남의 밭’이 어디인가요.

앞집 아저씨, 뒷집 아줌마의 밭이 ‘남의 밭’인가요. 아닙니다.

‘남의 밭’은 바로 ‘소’를 찾기 전의 ‘나의 밭’이죠.

온갖 집착과 욕망을 안고 뛰어다니던 바로 그밭이죠.


그말을 듣고 젊은 스님은 크게 깨칩니다. 그래서 소리치죠.

“내 소가 백장 밭에 들어간다!”고 말이죠.

이제 젊은 스님은 명확히 안 거죠.

‘나 없는 밭’이 ‘나의 밭’이고, ‘나 있는 밭’은 ‘남의 밭’임을 말이죠.

백장 선사의 밭도 ‘나 없는 밭’이겠죠.

그래서 ‘나의 밭’이 ‘백장 밭’이 되고, ‘백장 밭’이 ‘나의 밭’이 되는 거죠.

결국 “내 소가 백장 밭에 들어간다”는 말은 “내 소가 내 밭에 들어간다”는 말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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