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大隱(대은) / 中隱(중은) / 小隱(소은)

글모음(writings)/한시(漢詩)

by 굴재사람 2015. 8. 30. 13:48

본문

反招隱(반초은) / 王康琚(왕강거) -

 

小隱隱陵藪 (소은은릉수)  소은은 산속에 숨고

大隱隱朝市 (대은은조시)  대은은 도시에 숨는다.

伯夷竄首陽 (백이찬수양)  백이는 수양산에서 살았지만

老聃伏柱史 (노담복주사)  노자는 주사 벼슬 밑에 숨었다.

昔在太平時 (석재태평시)  그 옛날 태평성대에도

亦有巢居子 (역유소거자)  둥지에 살던 이가 있었는데

今雖盛明世 (금수성명세)  지금 비록 성세는 아니지만

能無中林士 (능무중림사)  어찌 숲 속에 사는 이가 없겠는가.

 

王康琚=東晉(317-419)시대의 문인. 생몰년대미상

陵藪=숲이 우거진 외진 곳, 산속

朝市=조정과 저자거리, 세속

=숨다

老聃=노자

柱史(=柱下史)=천문 등과 관련된 낮은 벼슬.

巢居子=나무 위에 둥지를 만들고 그 속에서 살아 소부(巢父)’로 불린 隱者. ‘소부와 허유(許由)의 고사로 널리 알려짐.

 

 

 

[참고] 白居易中隱論

 

中隱(중은) / 白居易(백거이)

 

大隱住朝市 小隱入丘樊 (대은주조시 소은입구번)  대은은 저자에 살고 소은은 산으로 들어가지만

丘樊太冷落 朝市太囂喧 (구번태냉락 조시태효훤)  산속은 너무 쓸쓸하고 저자는 너무 시끄러워

不如作中隱 隱在留司官 (불여작중은 은재류사관)  중은이 되는 만 못하니 하급 관료로 숨어사는 것이 좋겠다.

 

朝市=‘조정과 시장이지만 中隱의 취지를 살려서 조정은 빼고 시장만 새기는 편이 좋을 듯.

留司官=백거이가 太子賓客으로 두 차례 맡았던 東都分司의 직책. 또는 천문 등을 담당하는 하급 한직 관료

 

 

似出復似處 非忙亦非閒 (사출복사처 비망역비한)  물러난 것도 같고 일하는 것도 같고 바쁘지도 한가하지도 않다.

不勞心與力 又免饑與寒 (불로심여력 우면기여한)  마음과 힘을 다 쏟지 않고도 배고픔과 추위를 면한다.

終歲無公事 隨月有俸錢 (종세무공사 수월유봉전)  해가 다 가도록 이렇다 할 공무가 없어도 달마다 월급이 나온다.

 

似出復似處=자리에서 물러난 것도 같고 다시 맡은 것도 같고=출근하면 일하는 것 같고 퇴근하면 은거하는 것 같고.

 

 

君若好登臨 城南有秋山 (군약호등림 성남유추산)  그대가 산과 물을 좋아한다면 성 남쪽 가을 산이 좋고

君若愛遊蕩 城東有春園 (군약애유탕 성동유춘원)  그대가 질탕하게 놀기를 즐긴다면 성 동쪽 봄 동산이 좋다.

君若欲一醉 時出赴賓筵 (군약욕일취 시출부빈연)  그대가 취하고자 한다면 언제나 손님으로 잔치에 참석할 수 있다

 

登臨=산에 오르고 물가에 임하다.

 

 

洛中多君子 可以恣歡言 (낙중다군자 가이자환언)  낙양에는 군자가 많아 마음껏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君若欲高臥 但自深掩關 (군약욕고와 단자심엄관)  만일 편히 누워있고 싶으면 단지 문을 깊이 닫아걸면 된다

亦無車馬客 造次到門前 (역무거마객 조차도문전)  수레와 말 탄 손님이 순식간에 문전에 닥치는 일도 없다.

 

 

亦無=車馬客造次到門前하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造次(=造次間)=아주 짧은 사이.

 

 

人生處一世 其道難兩全 (인생처일세 기도난양전)  사람이 한 세상 살면서 두 가지 길을 완전히 하기 어려워

賤即苦凍餒 貴則多憂患 (천즉고동뇌 귀즉다우환)  빈천하면 춥고 배고파 괴롭고 귀하면 근심이 많아진다.

唯此中隱士 致身吉且安 (유차중은사 치신길차안)  오직 이렇게 중은하는 선비만이 신세가 길하고 편안하다.

窮通與豐約 正在四者間 (궁통여풍약 정재사자간)  궁함과 통함 풍부함과 간소함 이 네 가지 중간에서 산다.

 

其道難兩全=여러가지 일을 하기 어렵다는 취지

 

 

 

[참고] 蘇東坡中隱論

 

六月二十七日望湖樓醉書五絶其五(유월이십칠일망호루취서오절기오) / 蘇東坡(소동파)

 

未成小隱聊中隱 (미성소은료중은)  소은을 못 이뤄 잠시 중은으로 살지만

可得長閒勝暫閒 (가득장한승잠한)  긴 여유가 짧은 여유보다 꼭 좋은 것일까

我本無家更安往 (아본무가갱안왕)  나는 집이 없는데 여기서 다시 어디로 가나.

故鄕無此好湖山 (고향무차호호산)  고향에도 이처럼 좋은 호수와 산이 없는데.

 

蘇軾(1036-1101)=의 대시인

제목은 六月二十七日望湖楼酔書五絶(=627일 망호루에서 취해서 쓴 오언절구) 모두 다섯 편 중 이 시는 그 중 다섯 번째.

中隱=왕강거(王康琚)반초은(反招隱)’ 및 백거이(白居易)중은(中隱)’을 참고할 것. 中隱吏隱(벼슬하며 숨어사는 은자)’이라고도 함. 未成小隱聊中隱=아직 산림에 은거하지 못해 잠시 벼슬하며 숨어살지만

可得長閒勝暫閒=산 속의 긴 여유가 벼슬 중의 짧은 여유보다 꼭 좋은 것일까.

=어디, 어느 곳

 

*未成小隱聊中隱: 소은은 벼슬을 버리고 산림에 묻혀 은거하는 것을 가리키고, 중은은 한직에 있으면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며 정신적으로 은거하는 것을 가리킨다. 백거이(白居易)도 그의 시 <중은>에서 대은은 조정과 시가지에 사는 것, 소은은 구릉과 울타리 안에 드는 것, 구릉과 울타리 안은 너무나 쓸쓸하고, 조정과 시가지는 너무 시끄러우니, 한직에 있으면서 중은을 해, 관직 속에 은일함이 나을 것 같네(大恩住朝市, 小隱入丘樊, 丘樊太冷落, 朝市太囂喧, 不如作中隱, 隱在留司官)”라고 해서 중은을 지향한 바 있다. -: 들렐 효 들레다(야단스럽게 떠들다)

*애오라지 료, 애오라지 요 애오라지(부족하나마 그대로), ‘겨우, 오로지를 강조한 말

*長閑= 소은 暫閑= 중은

*: 더 이상 : 어디로

 

<해제>

희령 5(1072) 6월 항주 서호에 있는 망호루 아래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술이 거나하게 취한 채 그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면서 지은 것이다. 평소 전원으로 돌아가 은거하고 싶어 하면서도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지금처럼 일이 많지 않은 지방관으로서 공무를 조금씩 보면서 틈틈이 자연을 즐기는 것도 좋겠다는 소동파 특유의 중은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 은거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속세를 아예 벗어나 은거하는 것을 소은(小隱), 작은 의미의 은거이다.

소은은 다시 종사하는 일이나 은거하는 곳에 따라 어은(漁隱), 임은(林隱), 야은(冶隱)이라고도 한다.

 

반면 시끄러운 도시나 분쟁이 많은 조정 속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은자의 여유를 누리는 은거는 대은(大隱)이라고 한다.

대은은 이은(吏隱), 시은(市隱)이라고도 한다.

대은은 漢武帝 때의 동방삭(東方朔)과 晉나라의 시인인 도연명(陶淵明)이 있다.

 

낭관(郎官)으로 있던 동방삭이 전혀 속박을 받지 않고 거리낌 없이 행동하자

사람들이 모두 미치광이라 하였는데, 술이 거나하게 오른 그는 말했다.

 

"나는 조정안에서 속세를 피해 사는 사람이다.

어찌 옛사람처럼 깊은 산 속에서만 속세를 피하라겠는가."

 

도연명은 음주(飮酒)라는 시에서 시끄러운 속세에서도 여유로움을 노래하였다.

 

"사람들 사는 곳에 집을 지었지만 거마의 시끄러운 소리 들리지 않네

그대에게 묻노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마음이 멀어지면 지역은 절로 외지는 것이라오."

 

속세의 이해에 초연하게 되면 수레소리 시끄러운 번화가에 살더라도

산골짜기에 숨어 사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채근담(菜根譚)에서 "부귀을 뜬구름처럼 여기는 기풍을 지녔더라도

굳이 바위 동굴 같은 데서 거처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宋나라 시인 誠齋(성재) 楊萬里(양만리)의 시가 마음에 다가온다.

 

"중이 되기 전에는 일 많은 속세가 싫더니 막상 승려가 되고 보니 일이 더욱 많구나"

 

 

 

* 한직에 있으면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며 정신적으로 은거함을 의미하는

‘중은(中隱)’은 소동파가 ‘망호루에서 술에 취해 제5수’라는 시에서 말한 개념이다.

송대의 소동파와 함께 당대의 백거이는 대표적 중은론자다.


소동파는 현실참여주의자로서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는 지식인이었으며 사명감이 투철한 시인이었다.

또 다정다감한 성격이어서 백성에 대한 연민의 정뿐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인간적 애정과 관심도 유난히 깊었다.


다른 한편으로 지나친 물질주의를 추구하지 않았고 현실 도피적 사고방식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또한 자연을 사랑하고 그 자신이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의 일부가 되기를 바랐다.

소동파의 삶과 사상, 시어 등 모든 것이 어쩌면 한국인의 정서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동파의 ‘망호루에서 술에 취해 제5수’라는 시에는 ‘대은(大隱)’, ‘중은(中隱)’, ‘소은(小隱)’이란 말이 나온다.

대은은 조정과 시가지에 사는 것, 소은은 벼슬을 버리고 산림에 묻혀 은거하는 것을 가리키고,

중은은 한직에 있으면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며 정신적으로 은거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 중국에서 벼슬길에 나간 사람들은 소은을 하기를 바랐지만 대부분 대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의 삶 또한 대부분 생활전선을 떠나지 못하는 대은의 삶이다.
소동파는 그래서 차선으로 선택한 게 중은이다. 하지만 중은도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한직에 있으면 ‘밀려났다’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 때문이다.


소동파는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 관리의 역할에 충실했고 또 문인으로 수많은 글을 지었다.

30살 조정에 들어간 소동파는 그해 부인이 사망하고 이듬해 부친조차 세상을 떠났다.


왕완석의 신법파에 반대하는 구법파에 섰다 정치적 마찰이 극심해지자 지방관을 자청해 떠나기도 했다.

신법파들은 소동파의 시문 가운데 왜곡할 수 있는 것들을 들춰내 모함을 했고

결국 투옥되어 45살에 사형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나 유배 길에 올랐다.


유배는 그의 문학을 또한 성숙시키는 계기가 됐다.

흔히 단점이 장점이 되고 장점이 단점이 된다는 말은 소동파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5년이 넘는 유배기간에 그는 황무지를 얻어 이를 개간해 ‘동파(東坡)’라는 호를 짓고 은거를 하면서 스스로 동파거사를 자처했다.

 
50살에 다시 조정에 들어간 소동파는 54살에 다시 모함을 받자 자청해서 항저우 태수로 갔다.

환갑을 앞두고 다시 유배령에 처해진 소동파는 급기야 하이난다오에 있는 탄저우(지금의 샹탄)에까지 보내졌는데

말하자면 중국 문화권 바깥으로 추방된 셈이었다.


그러나 소동파는 더위와 습기, 가난 등 모든 악조건과 싸우면서도

초연한 마음으로 열대 섬 지방에서 3년에 걸친 유배 생활을 견뎌냈다.

65살에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이듬해 7월 28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연이은 정치적 불행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소동파는 중은의 삶을 살았다기보다

조정에서 밀려난 ‘강요된 중은’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요된 중은의 삶이었지만 그게 오히려 소동파의 문학 창작의 샘을 더 풍부하고 깊게 해주었다.

자신에게 드리워진 불행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불행을 안고 치열하게 글로 숙성해 냄으로써

후세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큰 좌표로 삼게 해준 것이다.


* 당대의 백거이는 대표적인 중은론자로 통한다.

‘장한가’로 유명한 백거이는 시를 통해 비판했던 고위관료들의 반감을 사서 좌천되기도 했다.

또한 장안에서 벌어지는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를 피하기 위해 51살 때에는 자진해서 항저우 태수가 되었다.

이후 그는 뤄양에 영주하였고 71살 때 형부상서로 관직을 마쳤다.


백거이는 ‘북창삼우(北窓三友)’로 유명한데 그가 친구로 삼은 술과 시, 거문고를 말한다.

북창삼우와 시름을 달랜 백거이는 지방의 관직에 은거하면서 중은의 삶을 살았다.

백거이가 유배령에 처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면 소동파보다는 덜 조정대신들의 핍박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정대신과 긴장관계 속에서 아예 지방의 한직을 택해 은거하는 방식을 택했다.

자연에 은거하는 삶이 아니라 지방관에 은거하는 삶이었던 셈이다.

봉건왕조에서 자신의 충정이 외면당하고 정당하지 않게 배척당하면

역모를 꾀하거나 아예 관직을 버리고 산속에 은거하는 방법을 택한다.

백거이는 이와 달리 파벌에 끼어야 살아남는 조정의 관직생활을 버리고

지방으로 내려가 관직생활을 하며 시를 지으면서 지조 있는 삶을 택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술과 거문고, 시로 달랬던 셈이다.


이렇게 보면 백거이의 중은은 소동파의 중은과 조금은 성격을 달리한다.

 

백거이가 조정에서 지방으로 좌천당하자 아예 지방 관리를 자청해 그곳에서 눌러 산

‘자의에 의한 중은’인 반면 소동파는 치열하게 조정과 긴장관계를 유지했고

결국에는 유배지를 전전하게 되는 ‘강요에 의한 중은’을 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시문으로 시름을 달래며 후세에 길이 이어지는 글들을 남겼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