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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詩仙), 시성(詩聖) 그리고 사회파 시인 - 이백 · 두보 · 백거이

글모음(writings)/한시(漢詩)

by 굴재사람 2015. 8. 30.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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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詩仙), 시성(詩聖) 그리고 사회파 시인 - 이백 · 두보 · 백거이

 

 

중국이 세계 문학사에서 자랑하고 있는 것이 당나라 때의 시이다.

과거시험 중 진사과의 수험 과목에 시가 들어 있던 것도 우수한 시를 낳는 텃밭이 되었다.

중국 문학의 특성을 가리키는 말에 '당시() · 송사() · 원곡() · 명청소설()'이라는 것이 있다.

당시의 중에서도 성당기()인 현종 때 이백 · 두보 · 왕유() 등이 활약했고,

만당기()에 백거이(), 곧 백낙천()이 격조 높은 시를 발표하였다.

이백(, 701~762)의 출생지는 서역 지방이라고도 하고 사천이라고도 한다.

25세 때 강남에 이사한 후 각지를 유랑하면서, 시인인 맹호연() 등과 교유하였다.

42세 때 현종을 모시며 한림원 공봉()으로 근무하면서 이백은 궁정에 출입하는 많은 관리 및 문인들과 교제를 가졌고,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크게 발휘하였다.

"이백은 술 한 말에 시 백 편을 짓고, 장안의 술집에서 잠을 잔다.

천자가 부르지만 그 배에 타지 않고, 자기는 술에 취한 신선이라 말한다."

이것은 두보가 이 무렵의 이백을 노래한 유명한 시다.

이백은 얼마 못 가서 간신의 모함을 받아, 3년째 되던 해 해직되었다.

실의에 빠진 이백은 낙양으로 가서 두보와 만나게 되었고, 서로 뜻이 맞아 함께 각지를 방랑하며 많은 시를 지었다.

755년, 안사(安史)의 난은 도리어 이백으로 하여금 궁정 생활로 돌아가게 해 주었다.

당시 장강() 일대는 현종의 아들이며 숙종의 아우인 영왕() 인()의 지배 아래 있었는데,

영왕이 이백을 부른 것이다.

그때 영왕은 현종이 사천으로 피신한 후 즉위한 숙종으로부터 적으로 규탄을 받아 토벌령이 내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백은 영왕의 세력을 믿었던 것이다.

이백의 기대와는 달리 영왕군은 숙종의 토벌군과 싸워 패하였다.

이백은 반역죄로 멀리 서쪽 야랑(, )으로 유배되었다.

실의 속에 귀양지로 가는 도중 은사령이 내려, "천릿길 강릉()을 하루에 돌아왔다"고 말하였다.

그 후 안사의 난의 진압군에도 가담했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당도(),

오늘의 안휘성 무호()로 돌아와 62세로 죽었다.

사람들은 이백을 가리켜 '시선()'이라 부른다.

 


시성()으로 추앙받는 두보(, 712~770)는 유서있는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이 몰락하여 몹시 가난하였다.

일곱 살 때 시를 짓기 시작했고, 14세 때에는 낙양에서 그의 시가 화제에 오를 정도로 시재를 인정받았다.

두보는 24세 때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그는 20세 때부터 강남을 중심으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그것은 한가로운 여행이 아니라 먹을 양식을 구해 떠돌아다닌 고달픈 생활이었다.

30세 때 양씨()와 결혼하여 낙양 근교에 신혼살림을 차려 이백과 만나게 되었다.

이때 두보는 33세, 이백은 44세였다. 두보는 천재 시인 이백과의 2년에 걸친 교유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746년, 두보는 장안으로 이사하여 벼슬자리를 구하기 위해 다시 과거에 응시했으나,

재상 이임보()의 횡포로 그해 응시자는 전원 불합격 처리되었다.

생활에 쪼들린 두보는 현종과 고관에게 글과 시를 바쳐 44세에 가까스로 말단 관직을 얻었다.

그러나 그때 안사의 난이 발발하여 반란군이 장안을 공격했기 때문에 두보는 가족을 이끌고 피난길에 나섰다.

그러나 반란군에게 붙잡혀 8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 시절에 두보가 지은 작품으로 '나라는 망했어도 산과 강은 여전하네()'라는 구절로 유명한

<춘망()>과 출전 병사를 보내는 가족의 슬픔을 노래한 〈병거행()〉 등이 있다.

두보는 이와 같은 격변하는 생활환경 속에서 학정에 시달리는 민중에 대한 크나큰 애정을 담은 시,

정치에 대한 울분을 토로한 시, 자연의 아름다움과 농민의 안락함을 노래한 시 등 다양한 시를 썼다.

두보의 시는 천재형인 이백처럼 막힘없이 단숨에 내리쓰는 것이 아니라 한 글자, 한 구절씩 음미하면서 갈고 닦아 빚어진 것이다.

유력자를 찾아 각지를 유랑한 두보는 정착해 살 집도 없어 배를 타고 살다가, 급속하게 건강을 해쳐 쉰아홉의 나이로 호남에서 죽었다.

 


만당()의 사회파 시인 백거이(, 772~846)는 中(중당) 최고의 시인으로 이백, 두보와 함께

당 나라 3(대시인)의 한 사람이다. 자 (낙천). 호 (취음선생), (향산거사)이다.

섬서성 (하규, 위남) 사람으로 지방 관리의 집에서 출생하여,

다섯 살 때 이미 뛰어난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29세 때 과거를 보아 진사과에 합격했고, 관리 생활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순조롭게 출세가도를 달렸다.

두보 시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백거이는 관리의 몸이면서도 민중의 비참한 생활에 대해 크게 근심하는 한편,

사치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관리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시를 발표하였다.

백거이는 자기가 시를 쓰는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을 위하여, 신하를 위하여, 사물을 위하여, 사건을 위하여 쓴다. 글을 위해 짓는 것이 아니다."

백거이는 그의 시에 대한 비난도 한 원인이 되어 사천()으로 좌천되었다.

지방에서 여러 해 사는 동안 그의 시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이전 시에서 나타나던 날카로운 정치 비판이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 대신,

평이한 문체로 달콤한 서정을 담고 있는 시를 발표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서사시의 성격을 띤 장시 <장한가()>와 <비파행()>이다.

<장한가>는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소재로 한 것이다.

현종이 양귀비를 총애한 나머지 정사를 게을리하여 난리가 일어나고,

촉으로 피난하는 도중 군신의 항의로 귀비를 목 졸라 죽이게 한다.

그 후 황제는 밤낮으로 귀비를 잊지 못해, 오래오래 한스러움을 품게 된다는 내용이다.

<비파행>은 강주 사마()로 좌천된 다음해 가을,

작자가 심양강에서 한 상인의 아낙네를 만난 것을 소재로 하여 쓴 것이다.

그녀는 한때 장안에서 재색을 겸비해 인기 높던 기생이었다.

시인은 그 여인의 불행한 운명을 생각하며 또한 자기의 불우함을 새삼 느낀다.

백거이는 만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와 친교를 가지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며 자신의 시문집인 <백씨문집()> 75권을 직접 편찬하였다.

백거이는 당시로서는 장수하였다 할 수 있는 일흔다섯의 나이로 죽었다.

위에서 살펴본 세 시인은 한결같이 관리 출신으로서, 당시의 지배 계층에 속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가난한 민중에게 따뜻한 애정을 기울인 시들을 썼다.

당의 시는 그 이전의 시에 비해 표현이 사실적이고, 내용도 훨씬 심화되었다.

그 위에 천재적인 기교도 더해져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명시가 많이 나오게 된 것이다.

 

對酒(대주) 술잔을 들며 

 

- 白居易(백거이) -

 

蝸牛角上爭何事(와우각상쟁하사) 달팽이 뿔위에서 무엇을 다투는가

石火光中寄此身(석화광중기차신) 부싯돌 불꽃처럼 짧은 순간 사는데

隨富隨貧且歡樂(수부수빈차환락) 풍족한대로 부족한 대로 즐겁게 살자

不開口笑是癡人(불개구소시치인) 하하 웃지 않으면 그대는 바보.

 

* 세속의 운명과 그 달관의 노래다.

현대그룹의 고 아산 정주영 회장이 생전에 그의 서재에 걸어놓고 음미하던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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