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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바위

글모음(writings)/좋은 시

by 굴재사람 2013. 10. 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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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위이므로 할 말이 너무 많아 입을 다물었다

벙어리의 길만 찾아 걷다가 여기까지 왔다

사람들의 속내를 다 보았으므로 눈 감고 귀 막아도

솔바람 소리에 얼핏 고개를 돌리는 그대 모습 잘 보인다

높은 데서 하늘을 마주 보며 혼자 누워 있어도

저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나는 늘 마음에 걸린다

갑오년이던가 관군에 쫓기던 동학패가

산을 넘어 사라진 뒤

모두 잡혀 효수되었다는 소식을 소나기가 전해주었다

내 몸도 천둥처럼 찢어질 듯 떨었다

저녁 무렵 혼자 서서 지는 해 바라보던 혁명가도

소년 병사도 토벌대도 나무꾼도 경배자도

지금은 모두 사라져 산에 보태는 흙이 되었다

나는 밤새도록 검은 울음을 참느라 가슴에 큰 응어리가 생기고

굳어질 대로 굳어져서 단단한 살결로 남았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일 험하고 어렵지만

사람들은 퍼질러 앉아 쉬거나 노닥거릴 때 있느니

누군가는 웃고 떠들고 누군가는 한숨짓고 누군가는

울음을 터뜨려도 내려가면 모두 언제 그랬냐 싶게

부지런히 살며 또 희망을 걸며

조금씩 조금씩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것을 알겠다

나는 모두 알아버렸으므로 나는 바위이므로

사람들이 남긴 숨결로 언제나 나를 가득 채운다

나는 예민해져서 인기척에 자주 놀라지만

끝내 그대를 노려보거나 각을 세우지는 않는다

 

 

― 이성부의 시 「마당 바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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