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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는 그림자가 없다

글모음(writings)/꽃과 나무

by 굴재사람 2009. 12. 31.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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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는 그림자가 없다

 

 

1.
마음(心)에 대한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소박하게 간명하게 정리를 해보자. 가령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욕심(慾心), 의심(疑心)도 마음은 마음이다. 이른바 희로애락의 감정을 포함한 오욕칠정도 마음은 마음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본래의 마음(心) 그 자체는 아니다. 마음(心)이 어떤 형태로든 변질이 된 것이고 순수한 본래의 마음은 아니다.

또 통상적인 의식(意識)도 마음이다. 그리고 의식이 관성화 되어서 의식의 반경을 벗어나 버린 무의식이란 것도 마음이다. 그러나 이것들도 마음 그 자체는 아니다. 마음이 1차, 2차적 변형을 거친 것이고 마음(心)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통상적으로 이런 마음, 저런 마음을 말하고 있지만 마음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 마음이 변질, 변형된 것을 마주하고 있다.

마음 심(心)의 의미를 소박하게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중심(中心)이란 말도 쓰고 핵심(核心)이란 말도 쓴다. 중심, 핵심에서 말하는 심(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음과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은 중심, 핵심이라고 할 때, 이것이 차라리 마음(心)을 보다 정확하게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나의 존재적 근원, 나의 생명력의 근원, 근원적 동력, 이런 개념으로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차라리 정확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의 이야기는 밑도 끝도 없다.

지구에도 마음이 있고 돌에도 마음이 있다. 짐승들도 마음이 있다. 마음을 돼지처럼 써서 돼지가 된 것이고 마음을 소처럼 써서 소가 된 것이다. 존재의 본원이랄까 생명력의 근원인 마음은 다르지 않다.

불교에서 인간의 어리석음, 무명(無明)을 말한다. 무명(無明)이란 말은 관념적인 말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어둡고 캄캄하다는 말이다 당초의 밝은 빛이 꼬이고 또 꼬이면서 그렇게 캄캄해졌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래 밝은 마음이 굴절되고 왜곡되면서 마침내 그렇게 캄캄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캄캄해지고 어리석어진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마음의 그림자다. 물론 그것들이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본래의 마음, 그 본래의 빛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래의 빛을 놓쳤고 그림자를 쫓아 춤추며 산다. 석가모니가 설한 12연기는 마음의 굴절과정, 빛의 굴절과정을 그렇게 단계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을 이야기할 때, 이런 마음, 저런 마음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마음이 아니라 마음의 그림자일 뿐이지 마음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늘 마음의 그림자를 붙잡고 산다. 중심(中心)을 놓치고 핵심을 놓친다. 마음을 모른다는 것, 나의 근본을 모르고 산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일평생 나를 주장하고 무수한 인연 속에서 부침하지만 정작 인연의 기원을 모른다는 것이다.

마음을 깨쳐야 한다고 그렇게 거듭 거듭 말하는 것도 다른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 ‘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도 결국 그 이야기일 것이다. 또 ‘고향 가는 길’을 말하는 것도 그 이야기일 것이다. 결국 나의 근본을 알자는 이야기다. 나의 생명력의 근원에 대한 믿음의 회복, 그 믿음의 회복에서 삶을 이끌어갈 수 있는 나의 빛, 나의 동력을 발견하자는 것이다.

2
가령 무수한 사물들은 무수한 그림자를 그린다. 같은 나무 하나라도 그림자는 시시각각 바뀐다. 그림자로써 나무를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나무의 그림자를 평생 쫓아다녀도 나무를 알지 못한다. 나무에는 본래 그림자가 없다. 태양이 뒤에서 비추니까 그림자가 생긴 것이지 본래 나무에는 그림자라는 것이 없다. 그러니 나무의 그림자는 나무가 아니다. 나무의 실체도 아니고 실상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무의 그림자를 보고 나무를 보지 못한다. 나무의 허상을 붙잡고 산다.

그래서 허상을 깨트린 어느 조사는 이렇게 노래했다.
달빛 아래 나무에 그림자가 없고
한낮 정오에 삼경을 때린다
‘월하수무영(月下樹無影) 일오타삼경(日午打三更)’

이 송(頌)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달빛 아래에서도 나무에 그림자가 없는데
그대는 대낮 광명천지에서도 나무를 보지 못하고 캄캄한 삼경의 한밤을 헤매는가?

그리고 염화시중(拈花示衆)의 일화, 석가가 영산에서 대중들에게 꽃을 들어 보인 것도 같은 이야기다. 내일이면 시들어버릴 꽃, 우리는 시들어 없어질 꽃을 쫓는다. 마치 그림자를 쫓다가 끝내 빛을 보지 못하는 눈뜬 봉사처럼, 빛의 자식이 빛을 보지 못하고 내일이면 시들고 죽어가는 꽃처럼 생을 마감한다. 결국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다.

/배영순(영남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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