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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글모음(writings)/꽃과 나무

by 굴재사람 2009. 10. 29.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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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국화

 

 

 

이 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봄부터 울고, 천둥은 여름날의 먹구름 속에서 울었다. 이 가을의 대명사, 국화(菊花)를 바라보는 미당 서정주 시인의 눈길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젊음의 방황을 지나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돌아보는 ‘누님’의 이미지에서 ‘국화=원숙함’의 등식이 읽힌다.

가을을 예찬하는 사람들은 국화를 빠뜨리지 않는다. 동양에서의 국화는 꿋꿋함의 상징이다. 차가운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 만물은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집 안에서야 그 서리의 차가움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새벽 무렵 야외에서 체감하는 서리는 날카로운 추위감을 가져다준다. 그 서릿발의 엄혹함을 버텨내고 꽃을 피운다고 해서 국화는 ‘오상지(傲霜枝)’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 절개가 가상타 하여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고도 부른다.

번잡하면서 속물 근성이 판을 치는 벼슬 사회를 벗어나 전원(田園)에 은거했던 시인 도연명(陶淵明)도 국화의 그윽함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음주(飮酒)’라는 시에서 속세의 욕망을 멀리하고 살아가는 심경을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를 캐며, 멀리 남산을 바라본다(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고 했다. 전원으로 돌아온 시인 도연명의 순수함이 국화를 향해 밑으로 향하다가 저 멀리 있는 남산으로 옮겨가는 시선에서 잘 그려지고 있다.

가을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잔함이 밀려드는 계절이다. 서리와 함께 추위가 다가오면 봄과 여름의 식생(植生)들은 대부분 잎을 떨어뜨린다. 나머지 생물들도 차가움을 피해 제가 들어가 앉을 자리를 찾는다. 이즈음에 강한 생명력으로 노랗고 하얀 꽃들을 피워내는 국화는 그래서 경이로움으로 비친다.

원숙함, 꿋꿋함, 순수함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 이런 이미지의 국화는 차갑고 움츠러드는 가을의 문턱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색다른 감상에 젖게 하는 존재다. 우주의 냉정한 순환 속에서도 생명의 강인함을 느끼게 해주는 고귀함의 상징이다.

이 가을을 맞이하는 마음이 어수선하다. 신종 플루가 사회 구석구석에 번지고 있어서다. 그 스산함 속에서 국화를 다시 감상해 보자. 날카로운 서릿발에도 끄떡없이 버티며 꽃을 피우고 마는 꿋꿋함의 상징. 그윽한 자태와 향기를 뽐내는 가을 국화는 아름다움 그 이상이다.

유광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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