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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자꽃

글모음(writings)/꽃과 나무

by 굴재사람 2008. 4. 29.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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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자꽃 / 안도현
      그해 봄 우리 집 마당가에 핀 명자꽃은 별스럽게도 붉었습니다. 
      옆집에 살던 명자 누나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누나의 아랫입술이 다른 여자애들보다 도톰한 것을 생각하고는 
      혼자 뒷방 담요 위에서 명자나무 이파리처럼 파랗게 뒤척이며 
      명자꽃을 생각하고 또 문득 
      누나에게도 낯설었을 初經이며 
      누나의 속옷이 받아낸 붉디붉은 꽃잎까지 속속들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꽃잎에 입술을 대보았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내 짝사랑의 어리석은 입술이 칼날처럼 서럽고 차가운 줄을 처음 알게 된 
      그해는 4월도 반이나 넘긴 중순에 눈이 내린 까닭이었습니다 
      하늘 속의 눈송이가 내려와서 혀를 날름거리며 달아나는 일이 애당초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명자 누나의 아버지는 일찍 늙은 명자나무처럼 
      등짝이 어둡고 먹먹했는데 어쩌다 그 뒷보습만 봐도 벌 받을 것 같아 
      나는 스스로 먼저 병을 얻었습니다 
      나의 樂은 자리에 누워 이마로 찬 수건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어린 나를 관통해서 아프게 한 명자꽃, 
      그 꽃을 산당화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될 무렵 
      홀연 우리 옆집 명자 누나는 혼자 서울로 떠났습니다 
      떨어진 꽃잎이 쌓인 명자나무 밑동은 추했고, 
      봄은 느긋한 봄이었기에 지루하였습니다 
      나는 왜 식물도감을 뒤적여야 하는가, 
      명자나무는 왜 다닥다닥 紅燈을 달았다가 일없이 발등에 떨어뜨리는가, 
      내 불평은 꽃잎 지는 소리만큼이나 소소한 것이었지마는 
      명자 누나의 소식은 첫 월급으로 자기 엄마한테 
      빨간 내복 한 벌 사서 보냈다는 풍문이 전부였습니다 
      해마다 내가 개근상을 받듯 명자꽃이 피어도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고, 
      내 눈에는 전에 없던 핏줄이 창궐하였습니다 
      명자 누나네 집의 내 키만 한 창문 틈으로 붉은 울음소리가 
      새어나오던 저녁이 있었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自盡할 듯 뜨겁게 쏟아지다가 잦아들고 
      그러다가는 또 바람벽치는 소리를 섞으며 밤늦도록 이어졌습니다 
      그 이튿날, 누나가 집에 다녀갔다고, 
      애비 없는 갓난애를 업고 왔었다고, 
      수런거리는 소리가 명자나무 가시에 뾰족하게 걸린 것을 
      나는 보아야 했습니다 
      잎이 나기 전에 꽃 몽우리를 먼저 뱉는 꽃, 
      그날은 눈이 퉁퉁 붓고 머리가 헝클어진 명자꽃이 
      그해의 첫 꽃을 피우던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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