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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東坡(소동파), 蘇軾(소식)

글모음(writings)/한시(漢詩)

by 굴재사람 2015. 8. 23.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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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東坡(소동파), 蘇軾(소식)

 

 

소동파(1036∼1101)는 중국을 대표하는 탁월한 문장가 중 한사람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며

북송시대에 지금의 쓰촨성() 메이산()에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소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 자첨(), 호 동파거사(), 애칭() 파공() ·파선() 등으로 불린다.

 

이름은 식()이며 동생으로 소철()이 있었고 동생과 비교하여 대소()라고도 불리었다.

부친 소순()은 구양수(), 왕안석() 등과 교우하며 송나라에서 이름난 문장가였다.

그의 가문은 부유한 지식인 집안으로 명망이 높았다.

 

스물두 살 되던 해에 진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공부를 계속하여 스물여섯 살 되던 해에는 제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신법파의 모함으로 그의 관직생활은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일생의 대부분을 유배생활과 각지의 지방관 생활로 보내다가

딴쪼우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얻은 병으로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예순여섯 살이었다.

소동파는 기본적으로 유교사상에 뿌리를 둔 현실참여주의자로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사명감이 매우 투철했다.

그는 워낙 다정다감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인간적 애정과 관심도 유난히 깊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불교사상과 도교사상에서 비롯된 현실도피적 사고방식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물질세계의 허무성과 무가치성을 간파하고 물질세계 바깥에서 노닐려는 초월적 인생관의 소유자였으며,

그 결과로 자연을 매우 사랑했고 나아가 그 자신이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다.

 

유가사상은 그로 하여금 끝까지 관직을 지키며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도가사상과 불가사상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쓰러지지 않도록 그를 붙잡아주는 버팀목이 되었다.

이러한 그의 폭넓은 사상은 다양한 작풍을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당시()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을 개척하였다.

대표작인 《적벽부()》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소동파가 우리 문단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했다.

 

이규보(, 1168∼1241)는 “세상의 학자들이 처음에는 과거시험에 필요한 문체를 익히느라 풍월을 일삼을

겨를이 없다가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시 짓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소동파 시 읽기를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에

매년 과거의 방이 나붙은 뒤에 사람마다 금년에 또 서른 명의 소동파가 나왔다고 여긴다”고 했다.

 

김부식(, 1075∼1151)과 동생 김부철()의 이름이

소동파[소식()]와 소철() 형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소동파에 대한 우리 문인들의 추앙심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제서림벽(西壁)

 

橫看成嶺側成峰(횡간성령측성봉)  가로로 보면 산줄기, 옆으로 보면 봉우리

遠近高低各不同(원근고저각불동)  멀리서 가까이서 높은 데서 낮은 데서
不識廬山眞面目(불식여산진면목)  여산의 참 모습을 알지 못하는 것은,
只緣自在此山中(지연자재차산중)  이 몸이 이 산속에 있는 탓이리.

 

여산 기슭에 있는 서림사(西)라는 절의 벽에 써놓았기 때문에

<서림사의 벽에>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이 시는 10여 일 동안 여산을 구경한 소감을 총결산한 것이다.

그가 내린 결론은, 여산은 보는 각도에 따라 매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것의 참된 면모를 알 수가 없었는바,

 

그 까닭은 바로 자신이 여산 안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가까이서 안 보일 때는 한 발 물러나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이치를 담고 있다.

첫 구절에서 여산의 여러 가지 형상 가운데 일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둘째 구절에서 여산의 전체적인 면모를 추상적으로 개괄한 후,

나머지 두 구절에서 이를 바탕으로 보편적인 이치를 도출해낸 것이 이 시의 특징이다.

널리 알려져 있는 '여산진면목'이라는 성어는 바로 이 시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우주와 인생의 이치를 설파하는 설리적() 성격은 당시()에서는 보기 힘든

송시()의 특성인데 소동파는 송시의 설리적 특성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소동파의 시는 철리를 말하고 있으나, 이장()에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이취()가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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