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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仙(시선), 詩聖(시성), 詩佛(시불) - 李白(이백), 杜甫(두보), 王維(왕유)

글모음(writings)/한시(漢詩)

by 굴재사람 2015. 8. 6.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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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仙(시선), 詩聖(시성), 詩佛(시불) - 李白(이백), 杜甫(두보), 王維(왕유)

 

 

중국에서 시는 문학 중 백미이다.

거대한 땅 오랜 역사 속에서 백미를 뽐내려던 시인은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오랜 전통의 문화 가운데에서 시의 풍류가 절정에 달했던 풍요의 시대는 성당(盛唐)이다.

이때를 살았던 시인 이백(李白), 두보(杜甫), 왕유(王維)는

중국인 들이 역대문학인 중에서도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문인이다.

이들에게 시선(詩仙), 시성(詩聖), 시불(詩佛)이란 최상의 칭호를 아끼지 않는다.

 

 

1. 이백(李白, 701~762)

 

자는 태백(太白)이며,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두보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이백은 악부(樂府)와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시대.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2. 두보(杜甫, 712~770)

 

자는 자미(子美)이며 호는 소릉(少陵)이다.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린다.

허난성[河南省]의 궁현에서 태어났다.

안사의 난을 겪으면서 그의 시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단시정형(短詩定型)의 근체(近體)는 특히 율체(律體)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六朝), 초당(初唐)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또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典型)으로 숭앙되어 왔다.

 

 

3. 왕유(王維, 701~761)

 

자는 마힐(摩詰)이고 산시성[山西省] 출생으로 시불(詩佛)이라 불린다.

9세에 이미 시를 썼으며, 서(書), 화(畵)와 음곡(音曲)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그 때문에 왕우승이라고도 불렸다.

 

왕유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궁정시인의 전통을 계승한 시인이라 하여

장안(長安) 귀족사회에서는 칭찬이 자자하였고 존경도 받았다.

 

그의 시는 산수.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노래한 것으로 수작(秀作)이 많은데,

특히 남전(藍田)의 별장 망천장(輞川莊)에서의 일련의 작품이 유명하다.

맹호연.위응물.유종원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병칭되어

당대 자연시인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또 그는 경건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 불교사상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송나라의 소동파는 왕유의 시를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평했다.

 

 

 

春日憶李白 (춘일억이백)   봄날 이백을 생각하며

 

- 杜甫 -

 

白也詩無敵 [백야시무적] 이백은 시에 대적할 이 없고
飄然思不群 [표연사불군] 휘날리는 시상 뭇 사람들과는 달라.
淸新庾開府 [청신유개부] 맑고 새로움은 유신과도 같고
俊逸鮑參軍 [준일포참군] 빼어나게 훌륭함 포조와도 같도다.
渭北春天樹 [위북춘천수] 위북에 머무는 봄날의 나무
江東日暮雲 [강동일모운] 강동에 떠도는 저녁 구름.
何時一樽酒 [하시일준주] 어느 때에나 술 한 잔 나누며
重與細論文 [중여세논문] 다시 함께 글을 논할까

 

* 천보(天寶) 3년(744년) 여름에 당나라 시단의 거성이었던 두보와 이백은 낙양에서 만났다.

이때에 이백의 나이는 44세, 두보의 나이는 33세였다. 두보는 과거에 낙방했고 이백은 궁중에서 떠났을 때이다.

낙양에서 만난 후에 이들은 함께 양(梁)과 송(宋) 지방을 두루 유람하였다.

그 후 잠시 이별했고 다음 해 가을 두 사람은 곤주(袞州)에서 다시 만났다가

이백은 강동(江東)으로 갔고, 두보는 장안(長安)으로 갔다. 그 후에는 다시 만날 기회가 없게 된다.

 

그러나 두보는 이백을 평생 생각하며 많은 수의 시를 지었다.

친구로서의 정이 깊었고, 속으로 사모하는 마음이 깊었다. 이 시도 이런 두보의 마음을 그린 시이다.

 

* 이 시는 비교적 많이 읽힌 작품으로 (현종 천보) 6년(747) 36세 때에 지었다고 한다.

‘두시언해’에서 이백과 관련된 시는 모두 8수인데, 이 시 외에 ‘(동일유회이백)’ ‘(몽이백)’

(송공소보사병귀유강동겸정이백)’ ‘(여이12백동심범10은거)’

(증이백 2수)’ ‘(천말회이백)’ 등이 있다.

 

이 시는 첫머리에 ‘’라 하여 이백을 높이지 않았으나, 이어서 ‘’이니 ‘’이라 표현하여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이어 2연[3~4구]에서는 유신과 포조를 들어 그를 찬양했다.

 

3연[5~6구]에서 전환하여 그를 그리는 정을 표출하여 ‘그대가 없는 여기 장안의 봄이 무슨 뜻이 있으며,

그대가 있는 강남의 저녁노을 구름도 내가 없으니 제 빛을 내랴.’ 하고 읊어, 이백을 향한 지극한 정을 나타내었다.

이 구절은 특히 (대구)가 멋져서 ‘, , ,

(위수강운, 모운춘수, 운수지회, 춘수모운정)’이라는 새로운 (어휘)가 생기게 되어

‘먼 곳의 벗을 생각하는 간절한 정’을 표현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는 언제 만나 함께 술 마시며 시와 글에 대해 논할 수 있으랴 하고 시인답게 끝맺어,

더불어 대화할 상대는 오직 이백뿐이라는 뜻을 숨겼다.

그런데도 이 둘은 이후 만나지 못했다고 하니 안타깝다.

 

* 이 시에 나오는 春天樹(두보) 日暮雲(이백)의 구는

후세에 멀리 떠난 친구를 그리는 두터운 우정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渭北 : 위수(渭水)의 북쪽, 시인이 있던 장안 일대를 가리킨다. 천추수는 곧 두보 자신에 대한 표현이다.

江東 : 장강(長江)의 동남쪽, 즉 강소 절강 일대. 일모운은 강동에서헤매일 이백을 형상화 한 말이다.

 飄然 : 범속을 초월하여 자유롭다

不群 : 일반인과 같지 않다

: (유신 513~581). (육조) 시대 (북주)의 문인. (개부의동삼사)를 지냈기로 ‘유개부’라 별칭함.

: (포조 405~466). 남북조 시대 남조 (송, 유송)의 시인. (남제)의 (사조)와 함께 남방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형주)의 참군 벼슬을 지냈음.

 

 

- 송영주의 <중국시와 시인>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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