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의 號를 보면 인생이 보인다
현대 한국인은 대부분 태어날 때 지은 이름(名) 하나로 평생을 살아간다. 모두 자신 이름에 만족할까. 500년을 이어 온 조선의 선비들은 최소한 셋 이상의 호칭을 지니고 있었다. 풍류와 품격이 담긴 멋들어진 이름들이 많았다. 부모와 스승이 부르는 이름이 달랐고, 처음 만나는 이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이름도 있었다. 친한 친구끼리 부르는 이름 또한 가지고 있었다. 명(名)과 자(字), 호(號)가 그것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독특한 게 호다. 명과 자는 부모나 스승이 지어줘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반면 호는 자신이 마음대로 지어 부를 수 있었다. 명과 자가 처음부터 타고난 운명이라면 호는 자신의 의지와 사상, 성격이 담긴 개성적인 삶의 표현이었다. 이를테면 호는 조선 선비의 자존심이었다.
신간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은 조선 선비들의 호를 풀이한 책이다. 정약용, 이이, 김홍도, 이황, 정도전, 박지원, 김시습, 정조 등 조선의 역사를 이끌어간 인물들의 호를 분석한다. 이들 선비는 세상에 초연하고자 했고 세상을 개혁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나아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스스로의 다짐을 호에 담아 표현하곤 했다.
조선 건국의 설계자 정도전의 호는 삼봉이다. 왜 삼봉이라고 지었을까. 그가 태어난 충북 단양의 비경 도담삼봉에서 호가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책을 쓴 역사평론가 겸 고전연구가 한정주는 “각종 문헌을 비교해보니 삼각산 삼봉, 즉 오늘날의 북한산을 가리켜 삼봉으로 지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정도전은 한양이 내려다보이는 삼각산에서 자신의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역성혁명의 큰 꿈을 품었을 것이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정도전의 야망이 ‘삼봉’이라는 그의 호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야망을 거침없이 드러냈던 정도전과 달리 호시탐탐 목숨을 노리는 수구 세력들을 피해 살아남으려고 애썼던 선비도 있었다. 조선 최고의 실학자 여유당 정약용이다. 그는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듯 신중하고(與),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여유당’이라고 지었다. 몰락한 남인 출신으로 정조가 아꼈던 재사 정약용은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자 노론 수구세력의 표적이 되었다. 스스로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내걸어 시시각각 옥죄어 오는 숙청의 피바람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노론의 칼바람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신유사옥이라 불리는 정치적 탄압으로 300여명이 처형됐다. 정약용은 겨우 목숨을 유지하고 유배지로 쫓겨났다. 여유당은 조선 당파싸움을 드러내는 호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부를 수 있는 호를 통해 자신의 철학과 신념, 지향, 개성을 표현했다. 왼쪽부터 삼봉 정도전, 남명 조식, 율곡 이이, 연암 박지원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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