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이야기] 이름이 서러운 우리 꽃들
요즘 산에 가면 철쭉이 거의 졌다. 그러나 간간이 연분홍 꽃잎이 남아 등산객들을 반기고 있다. 철쭉은 신라 향가 '헌화가(獻花歌)'에서 수로부인이 절벽에 핀 것을 보고 꺾어달라고 했던 바로 그 꽃이다.
우리 철쭉을 처음 세계에 알린 사람은 러시아 해군장교 슐리펜바흐(Schlippenbach)였다. 1854년(철종 5년) 4월 러시아 군함 팔라다호(號)는 부산에서 동해를 따라 올라가며 지형을 측량했다. 이 배에 탑승한 슐리펜바흐는 동해안에서 철쭉을 채집해 러시아 식물학자 막시모비츠에게 보냈다. 한국 식물을 채집해 서양에 연구자료로 제공한 최초의 사례였다('한국식물분류학사개설').
이 인연으로 두 사람 이름은 철쭉의 학명(學名)에 나란히 자리 잡았다. 철쭉 학명은 '로도덴드론 슐리펜바키 막심(Rhododendron schlippenbachii Maxim.)'인데, 로도덴드론은 '붉은 나무'를 뜻하는 속명(屬名)이고, 종명(種名)에 해군장교 이름을, 마지막에 명명자 자신의 이름을 넣은 것이다. 우리 학자가 철쭉의 학명을 정했다면 종명에 러시아 장교 대신 수로부인의 이름을 넣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생물에는 세계 공통으로 쓰이는 학명이 있다. 국제적인 명명규약에 따라 정하는데 라틴어로 속명과 종명을 표기하고, 종명 다음에 생물을 처음 분류한 사람 이름을 넣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자생식물 중에는 유난히 학명에 '나카이(Nakai)'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이 많다. 예를 들어 개나리는 한국 특산종인데도 학명이 'Forsythia koreana Nakai'다. 도대체 나카이는 누구일까.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1882~ 1952)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일한 일본의 식물분류학자였다. 그는 동경제대 식물학과를 졸업하고 1909년 스승의 권유로 한반도 식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에게는 체계적으로 식물을 연구해 분류할 학자가 없었다. 나카이는 총독부 촉탁연구원으로 1942년까지 17차례에 걸쳐 한반도 곳곳을 답사해 식물들을 채집했다. 그가 한반도에서 채집한 식물을 집대성해 펴낸 책 '조선삼림식물편'은 한반도 식물 연구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이에 따라 개나리는 물론 할미꽃·벌개미취·개느삼·각시투구꽃 등 한국 특산종에 대거 나카이 이름이 들어갔다. 세계적으로 1속 1종밖에 없는 희귀종인 미선나무에도, 토종 라일락인 수수꽃다리에도 그의 이름이 들어 있다. 한국의 자생식물 4000여종 가운데 16%의 학명에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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