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이야기] 여름꽃 대표 주자, 나리꽃이 피네
지난 연휴 때 수어장대 쪽으로 남한산성에 올라 털중나리를 찾았다. 털중나리는 전국 산에 비교적 흔한 꽃으로, 줄기와 잎에 미세한 털이 많다고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등산로를 따라 1시간 가까이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성곽 바깥쪽 나무들을 베어낸 곳에서 볼 수 있었는데 다시 나무들이 자라면서 털중나리가 햇볕 경쟁에서 밀린 것일까. 그러나 어디엔가 꼭 피었을 것 같았다. 서문(西門)을 좀 지나 드디어 노란빛이 도는 붉은색 털중나리를 만났다. 꽃잎 6장이 뒤로 확 말리고 꽃잎 안쪽에 듬성듬성 자주색 반점이 있는 것이 영락없는 털중나리였다. 아래 한두 개는 피고 위쪽은 아직 몽우리로 남아있는, 가장 예쁠 때였다.
강렬한 색감과 자신감 넘치는 자태가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특히 아래쪽에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보니 정말 좋았다. 한 중년 여성은 사진을 찍으며 "아이고, 너무 예뻐, 너무 예뻐"를 반복했고, 평소 과묵한 동행 분도 "땀 흘려 올라온 보람이 있네"라며 웃었다.
털중나리가 보이면 봄이 끝나고 여름이 왔다는 의미다. 나리는 이글거리는 태양과 맞서듯 여름에 피는 꽃이다. 빛이 잘 들지 않는 계곡에서는 피지 않고 능선 중에서도 빛이 잘 드는 곳에 많다. 그중 털중나리가 가장 먼저 피면서 무리 중 선봉대 역할을 한다. 그래서 여름꽃의 시작인 털중나리를 처음 본 기쁨을 쓴 글이 상당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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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나리는 여름을 대표하는 꽃이다. 야생화 동호회인 '야사모' 사이트에는 회원들이 찍은 사진을 올리는 코너가 있다. 이 코너를 살피면 그즈음 회원들이 관심을 갖는 야생화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최근 10년간 데이터를 집계한 결과, 6월에 가장 많이 올라온 꽃이 털중나리였다. 7월은 솔나리가 1등, 2등이 참나리, 3등은 하늘말나리였고, 하나 건너 5등은 땅나리였다. 6·7월은 단연 나리 종류가 상위권을 휩쓸고 있는 것이다.
그냥 '나리'라는 식물은 없기 때문에 나리는 나리 종류를 총칭하는 이름이다. 참나무가 어느 한 나무를 지칭하지 않고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등 참나무 종류를 모두 아울러 일컫는 이름인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주변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나리는 참나리다. 나리 중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하다고 해서 '참'이라는 접두사가 붙었다. 여름이 무르익는 7~8월이면 많은 꽃송이가 달리고, 꽃에 검은빛이 도는 자주색 반점이 많아 호랑 무늬를 이룬다. 이 때문에 참나리의 영문명은 'tiger lily'다.
참나리는 잎 밑부분마다 까만 구슬(주아·珠芽)이 주렁주렁 달려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까맣고 둥근 이 주아는 땅에 떨어지면 뿌리가 내리고 잎이 돋는 씨 역할을 한다. 무성생식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왕성하게 자손을 퍼뜨려 도심 화단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꽃이다.
다른 나리도 접두사가 붙어있는데, 이 규칙을 알면 만났을 때 이름을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꽃이 피는 방향에 따라 하늘나리는 하늘을 향해, 땅나리는 땅을 향해 핀다. 여기에다 '말'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줄기 아래쪽에 잎이 여러 장 수레바퀴 모양으로 돌려나는 것(돌려나기·윤생)을 뜻한다. 그러니까 하늘말나리는 꽃이 하늘을 향해 피고 잎이 돌려나는 나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작가 이금이의 동화 '너도 하늘말나리야'에서는 하늘말나리가 핀 것을 '무언가 간절히 소원을 비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섬말나리는 울릉도 특산이라 '섬'자가 붙었는데, 돌려나기 잎이 1~3층이다. 잎이 솔잎처럼 가는 솔나리도 있다. 대체로 나리꽃은 노란색에서 붉은색 사이인데, 솔나리꽃은 분홍색이다. 중나리는 주아가 없는 것 말고는 참나리와 거의 똑같아 '주아 없는 참나리'라고 할 수 있다.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백합도 나리 비슷하게 생겼다. 백합과 나리는 무엇이 다를까. 원래는 같은 말이다. 차이가 있다면 백합(百合)은 한자어이고, 나리는 우리말이라는 점밖에 없다. 흔히 백합이라는 이름 때문에 '백합은 하얀꽃'이라고 생각하는데, 백합의 '백'은 '흰 백(白)'이 아니고 '일백 백(百)'이다. 백합은 구근(알뿌리)식물인데, 구근의 비늘줄기가 백여 개 모여 있다는 의미로 백합이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면서 향기가 진한 개량종 원예종만을 따로 백합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요즘에는 울긋불긋하고 모양도 다양한 외래종 백합이 셀 수 없이 들어와 있다. 이런 백합 중에는 우리 자생 나리를 가져가 개량한 꽃도 적지 않다고 한다.
자생(自生) 나리는 꽃이 피는 시기가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초여름인 6월부터 초가을까지 순차적으로 아름다운 나리꽃을 볼 수 있다. 대체로 털중나리를 시작으로 하늘나리가 피고, 그다음 말나리·하늘말나리·중나리, 이어서 땅나리·참나리가 피고, 솔나리가 가장 늦은 8월까지 핀다. 이처럼 나리마다 피는 시기와 개성이 달라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나리도 다른 경우가 많다. 털중나리 뒤를 이어 한여름을 화려하게 장식할 나리들의 꽃잔치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