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이야기] 올여름도 100일간 붉게 피어날 꽃
'그들은 단연코 그 모든 것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 만큼 품격이 있었다. 보는 이 없는 폐교의 운동장을 여름 내내 지키고 있었을 배롱나무였다. 꽃잎들이 하롱하롱 지고 있었다. (…) 균형 잡힌 좌우대칭이 미학적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그 위에서 수많은 꽃이 막 떠오르는 우주선처럼 장중한 타원을 이루고 있었다.'
박범신 장편소설 '소금'에서 남자 주인공이 시우를 처음 만난 것은 배롱나무 그늘 아래였다. 소설은 가족 부양에 대한 부담 때문에 가출한 시우의 아버지 선명우, 끝까지 가족을 위해 희생한 선명우의 아버지, 자식을 위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부두 노동자로 살다 숨진 남자 주인공의 아버지 등을 대비시키면서 권위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부양 의무에 시달리는 요즘 아버지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배롱나무는 이 소설에서 소금과 함께 주요 소재이자 아버지의 상징으로 여러 번 등장한다. 어릴 때 선명우가 부모를 그려 오라는 숙제에 아버지의 상징으로 그린 것도 배롱나무였다. 한여름 내내 뙤약볕에 굴하지 않고 붉은 꽃을 피우고 기어이 열매까지 맺어내는 배롱나무의 강인함은 처자식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이 땅의 아버지들 모습과 닮았다.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서울 도심 여기저기서도 배롱나무꽃이 피기 시작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지만 배롱나무는 약 100일간 붉은 꽃이 핀다는 뜻의 '백일홍(百日紅)나무'가 원래 이름이었다. 그러다 발음을 빨리하면서 배롱나무로 굳어졌다. 꽃 하나하나가 실제로 100일 가는 것은 아니다. 작은 꽃들이 연속해서 피어나기 때문에 계속 피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멕시코 원산의 '백일홍'이라는 1년생 식물은 따로 있다. 원래는 주로 충청 이남에서 심는 나무였으나 온난화의 영향으로 서울에서도 월동이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서울에서도, 특히 최근 조성한 화단에서 배롱나무를 흔히 볼 수 있고 용산구 원효로와 구로구 등에는 가로수로 심은 배롱나무까지 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 많은 나무라서 '소금' 외에도 여러 문학 작품에 등장하고 있다. 이문열의 장편 '선택'에서도 배롱나무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다. 이 소설은 조선 사대부가(家) 여인의 전형적인 삶을 산 장계향(1598~1680)의 일대기를 다룬다. 처음 시댁에 도착한 장씨를 맞은 것은 배롱나무였다. '중문을 들어설 때쯤이었을까. 그 총중에도 무언가 날카로운 빛살처럼 내 눈을 찔러왔다. 움찔하며 곁눈으로 가만히 살피니 안마당 서쪽 모퉁이에 서 있는 한그루 자미수(배롱나무의 중국식 이름)였다.' 배롱나무는 장씨가 시집온 재령이씨 가문의 꽃이었다.
정지아의 단편 '행복'은 아직도 정세 판단을 위해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빨치산 출신 부모와 함께 어머니 고향에 다녀오는 이야기다. 여기서 배롱나무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고향을 상징하고 있다. 김훈 소설 '칼의 노래'에서는 이순신이 백의종군으로 남해로 내려갈 때, 흐드러지게 핀 배롱나무꽃이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의연하게 계절을 반복하는 자연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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