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망각의 세월 이야기

글모음(writings)/토막이야기

by 굴재사람 2013. 11. 3. 11:23

본문

◆ 망각의 세월 이야기 ◆


어릴 적에 시골에 살면서 듣고 본 것을 이제야 제대로 이해하고,
이런 것들에 대한 아스라한 추억을 글로 옮겨 보고자 한다.





● 첫째 이야기 : 다리 밑에서 주어온 아이 이야기

우리 고향에서는 대부분의 아기를 "북창다리"와 "채운다리"에서 주어 와서 키웠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 고장의 두 다리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하천 위에 세워진 가장 큰다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방조제로 막혀서 바닷물이 드나들지 않고 그냥 담수가 흐르는 하천으로 변하였다.

나도 아버지나 어머니가 "너는 북창다리 밑에서 주어 왔다."라고 하시면 괜히 내가 정말로 주어온 의붓 자식이 아닌가 하는 조바심을 친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는 북창다리 밑이 아니라 어머니 다리 아래에서 나왔다고 해야 할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둘러서 말한 것이 '이 애는 북창다리 밑에서 주어 왔다.'고 하는 에피소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요즈음은 아마도 내가 다리 밑에서가 아닌 엄마 다리 아래에서 태어 났다는 것을 청소년 무렵이면 대개는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탄생 이야기를 제대로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에둘러서 그 고장의 가장 큰다리로 바꾸어 말한 것이다. 우리 애들은 병원에서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 났으므로 엄마 다리 아래가 아닌 배위서 주워 왔다고 해야 할까요?




● 둘째 이야기 : 보퉁이를 머리에 인 할머니 이야기

공부를 하러 도시에 나와 있다가 시골의 고향 마을로 갈려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노라면, 시골 할머니들이 보퉁이를 머리에 이고서는 황급히 "어디가는 버스 행선지"를 물어 보셨다. 특히 시골장이 선날에는 더 많은 경우를 당하였던 기억이 난다.

나는 친절히 어디 가는 버스는 여기 저기에 있고 시간은 언제라고까지 알려 드렸다. 그런데 나중에 그런 경우를 가끔 접하다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타고 가야할 버스가 코앞에 있는데도 행선지를 묻는 다는 것을 생각하여 보니, 할머니들이 "한글"을 모르신다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유추하여 보면 우리는 당연히 학교를 다니었고, 한글은 기본적으로 다 깨웃쳤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당시에 60대 되신 분들 중에는 초등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분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중에 생각하여 보니 이분들이 일상 생활하시는데 불편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미치자, 우리 선대들은 자기들은 비록 못 배웠을지라도 "자식들만큼은 제대로 가르쳐야겠다."라는 일념으로 보퉁이를 머리에 이고 장에 나와서 갖은 농산물을 팔고 하셨던 것이었다.

이것을 아주 나중에 시골행 버스 속에서 이 사실을 느끼고는 조금 더 배웠다고 으쓱거리던 내가 속으로 심히 부끄러웠던 기억이 새롭다.




● 셋째 이야기 : 조카보다 어린 고모 이야기

우리 큰 어머님은 현재 고향의 시골에 홀로 계시는데, 연세가 1919년 기미생이시니 우리 연세로는 95세이시다. 우리 큰 어머님은 6형제의 맏이신 큰 아버님에게 19세에 시집을 오셨다고 한다.

시집을 오니 부잣집이라는 말은 온데 간데가 없고 사돈 댁의 논을 소작을 부쳐서 생활하는 지경이었다는 것이었다. 그 때에 시아버지(나의 조부)는 42세이셨고, 시어머니(나의 조모)는 40세이셨단다.

결혼 후에 한 1년이 지난 후에 사촌 큰형님을 출산하셨고, 큰 아들을 젖을 먹여 키우시는 중에 거의 돌이 되었을 때에 시어머님께서 막내로 따님을 출산하셨다는 것이었다. 이미 아들을 6형제나 두셨는데, 막내로 고명 따님을 얻으신 것이었다.

그분은 아직도 70대 중반의 연세로 정정히 시골에서 살아 가시는 우리 고모님이시다. 그래서 할머님의 노산으로 인하여 아드님(우리 사촌형님)과 시누이를 같이 젖을 먹여서 키우셨다는 것이다.

요사이 같으면 40가까이에도 결혼하는 것이 가끔 있을 정도로 만혼이 흔하지만, 그때만하여도 40전후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고, 며느리가 출산하였는데 다시 할머니가 출산하는 것이 가끔은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되는 예적 이야기이다. 그래서 고모님은 큰어머님을 키워 주신 어머님으로 여기시고 아주 각별히 대하시고 모신다.

7남매의 맏이에게 시집오셔서 지금은 남편(큰백부님)과 시동생 다섯을 모두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홀로 시골 집에서 고군분투하시면서 생존해 계신다.

우리 큰어머님과 같이 우리 앞세대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 나시고, 일본의 전쟁으로 인하여 징용을 당하고, 광복과 한국전쟁등을 온몸으로 겪어 내었으며, 그리고 사일구 혁명과 오일육 혼돈을 겪으면서 우리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셔서 우리가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시골에 외롭게 살고 계시는 윗분이 있으면, 종종 찾아 뵙고 그분들의 희생과 고생에 대하여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하는 것이 우리가 그분들에게 차려야할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한다.




● 네번째 이야기 : 손의 지문과 손톱이 자랄 틈이 없었던 분들의 이야기

나는 군대 생활을 방위소집(요사이 말로는 공익요원 근무, 신체검사에서 보충역으로 판정을 받은 이유는 어릴 때에 심하게 앓은 후유증으로 인하여 치과에 이상이 발생하여 안면 기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이 되어서 면사무소에서 근무하였다. 주요 업무는 호병계장 업무를 보조하여, 각종 민원 서류를 필사하는 것이었다.

그때만 하여도 호적 서류가 한문으로 되어 있었고, 일제시대부터 작성되어 계속 연결이 되어 있어서 어떤 경우에는 한 가족 호적이 아주 많은 분량으로 되어 있어서, 그것을 필사하려면 하루 종일 소요되기도 하였다.

70년 대 중반까지도 아직 호적이 한글화와 분가, 복사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서 일일히 민원 서류를 손으로 먹지를 대고 필사를 해야만 하였다.

그때에 현재의 주민등록 체계가 도입되어 전 주민을 대상으로 새로운 주민등록증을 발급하였다. 그때가 마침 농촌의 추수 계절이라 주민들을 면사무소로 나오라 할 수 없어서 면사무소 직원들이 해당 부락까지 출장을 가서 주민증을 발급하였다.

그런데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으려면 지문을 날인하여야 하는데, 농촌에서 일하시는 대부분들의 지문이 닳아 없어져 버려서 경찰공무원들이 지문을 채취하느라고 애를 먹고 하였다.

그때에 우리나라 농촌에 사시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악착같이 살았는가를 그분들의 손을 보고 알았다. 손톱은 아에 깍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닳아 있었고, 지문도 다 닳아서 지문을 뜰 수가 없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요즈음은 농촌에서도 일할 때에는 손에 장갑을 끼고 일하지만 70년대만 하더라도 대부분이 맨손으로 그 많은 일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지문을 뜰 수가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바가지에 뜨거운 물을 담아 오라하여, 30분 정도 손을 담가서 손이 불어서 지문이 나오도록 하여 겨우 지문을 뜰 수 있었다.

그 시절에는 농촌에 기계화라는 것이 경운기 정도가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논에 모심기, 김매기, 벼베기, 타작등을 대부분 인력에 의존하여서 하였고, 그 수고의 대부분은 손으로 일을 하였기 때문에 손톱과 지문이 남아 있지를 않았던 것이었다.



시골할머니들이 머리에 보퉁이를 이고 장에 다녀 오는 모습이 30-40년 전의 우리의 시골의 모습이었고, 그들의 고생과 수고가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누리는 경제적 풍요와 발전이 가능하였다고 본다.

그들은 일은 무척 고단하게 하였지만 막상 나이가 들어서 병마와 싸울 즈음에는 의료사회 보장 제도가 마련되지 않아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고인이 되고는 하였다.

이 시점에서 그 당시의 선대(우리의 부모님들)들의 희생과 고생에 대하여 정중한 마음으로 위로와 감사, 그리고 존경을 표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조그마한 성의가 아닐까 한다.





음악 듣기: 아래 표시하기 또는 재생하기 클릭


'글모음(writings) > 토막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좌지기(宥坐之器)  (0) 2013.11.06
인생이란 한바탕의 봄꿈(一場春夢)  (0) 2013.11.06
6자 비결과 4자 비결  (0) 2013.10.29
공자천주(孔子穿珠)  (0) 2013.10.28
기회  (0) 2013.10.18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