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바람꽃. 추위가 다 가기 전인 2월 중순 변산 설중에는 하얗고 탐스러운 변산바람꽃이 핀다. 꽃이 피는 것은 잿빛 대지를 살아 있는 빛깔로 바꾸는 일이다. 꽃은 대지에 눈감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눈뜨게 하고 삭막한 공간을 훈훈하고 따스하게 만든다. [사진 정성옥 회원]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나태주 시인의 ‘풀꽃’ 전문)
야생화에 빠지면 ‘대책’이 없다. 손톱만 한 크기의 야생화는 온실에서 다듬어진 화초에선 느낄 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낸다. 야생화에 매료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발길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 일주일이면 피었다 지는 꽃을 보기 위해 거친 산행도 마다 않는 사람들, 갖고 싶은 꽃을 차마 꺾을 수 없어 흙바닥에 납작 엎드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사람들이 한데 모였다. 야생화 매니어 6000여 명이 모인 ‘야사모(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바로 이들의 아지트다.
야생화 찍으며 금슬도 좋아져
지리산에서 발견된 모데미풀. [김원찬 회원]
정주홍(54)씨는 ‘화류계’에 입문한 지 올해로 4년째 되는 꽃쟁이다. 3년 전 담배를 끊고 금단 증상에 시달리던 그는 담배를 잊기 위해 카메라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마땅한 피사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늘 허전하고 만족스럽지 않았던 그는 산으로 들로 ‘찍을 거리’를 찾아다녔고, 한백산 정상에서 이제껏 보지 못했던 꽃들을 만났다. 담배를 피울 때는 느끼지 못했던 꽃향기도 머리를 맑게 했다. 지천에 널려 있는 꽃들을 카메라로 정신 없이 찍어대던 그는 ‘야생화를 찍으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야사모를 찾았다.
야사모에는 고수들이 많았다. 꽃이 피는 장소와 시기를 정확히 알고 꽃탐사를 가는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정씨는 점점 야생화 보는 눈을 떴다. 1월 초순에는 강원도에서 복수초를, 2월 중순에는 변산바람꽃을 찍고 3월이면 얼레지와 노루귀를 보러 떠났다. 집에 있던 부인도 따라나서면서 금슬도 좋아졌다.
바위 틈에서 자라는 난쟁이바위솔. [배양식 회원]
야사모의 꽃쟁이들은 꽃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 동강에서만 피는 동강할미꽃을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강원도 영월군으로 모이고, 자생지가 많지 않은 변산바람꽃을 사진에 담기 위해 서울에서 여수 향일암까지 6시간씩 달린다. 바람꽃만 해도 너도바람꽃·남방바람꽃·변산바람꽃 등 여러 가지 꽃을 다 봐야 한다. 가을엔 물매화를 봐야만 직성이 풀린다. 이 때문에 큰 사고가 날 뻔한 적도 있다. 3년차 꽃쟁이인 김경숙(52)씨는 “지난해 백작약을 찍는데 더 잘 찍고 싶은 욕심에 자꾸 내려가다 절벽에서 떨어질 뻔했다”며 “다행히 개다래줄기를 붙들어서 살았는데, 꽃에 취하면 절벽도 눈에 안 들어올 지경”이라고 말했다.
이들을 미치게 하는 야생화의 매력은 뭘까. 10년차 꽃쟁이 정덕희(46)씨는 “꽃을 보면 압도당하는 기분이 든다”며 “야생화의 신비한 기운이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13시간씩 산행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해란꽃이 내 첫사랑”이라고 말하는 김경숙씨는 “대부분의 야생화는 손톱만 하거나 커도 손가락만 해서 차가운 흙바닥에 납작 엎드려야 온전히 볼 수 있다. 야생화와 눈 마주치는 것은 ‘낮은 자세의 미학’”이라며 웃었다. 개화 기간이 짧은 것도 꽃쟁이들의 애를 태우는 매력이다. 윤연영(57) 야사모 회장은 “야생화는 1~2주간 피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다른 꽃에게 제 자리를 내준다”며 “그때를 놓치면 내년을 기약해야 하기 때문에 더 간절하다”고 말했다.
한국의 야생화 500종 도록에 담아
2010년 4월 다채로운 야생화로 가득한 강원도 인제군 곰배령을 찾은 야사모 회원들.
애정이 지나치면 큰 일을 내게 돼 있다. 야사모가 12년에 걸쳐 꾸준히 활동하고 회원이 늘어나자 회원들의 욕심도 커졌다. 일 년에 한 번 연말 사진전을 열던 동호회원들은 사진을 한두 번 보고 끝내는 전시회보다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누군가 게시판에 야생화 도록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했다. 알 수 없는 학명이나 일본 이름으로 가득 찬 식물도감 대신 회원들이 직접 발로 뛰고 절벽에 엎드려 얻어낸 사진들로 ‘우리꽃 도록’을 만들자는 얘기였다. 멸종위기 식물들의 생생한 사진들을 기록하자는 의견도, 동호회 10여 년의 내공을 담아낼 때가 왔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미 수준급에 오른 사진 실력들, 야생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들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혼자라면 할 수 없지만 수준급의 아마추어 야생화 사진작가들이 모인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온몸에 털이 난 가시연꽃. [윤연영 회원]
찬성 여론이 일자 작업은 빠르게 진행됐다. 먼저 9월 초 사진 선정위원회를 꾸리고 전국에서 8명의 위원이 선출됐다. 선정위원들은 국내 자생종 5000종 중 도록에 담을 500여 종을 선정했다. 예쁜 꽃과 멸종위기 식물 위주였다. 기준이 정해지자 전국 각지에 흩어진 회원들은 그간 자신이 찍은 사진 중 여기에 포함되는 작품을 출품했다. 한 송이 들꽃을 찍기 위해 숱한 시간들을 찬 바닥에서 보낸 회원들은 수도권·충청·영남·호남 지부로 나뉘어 게시판에 사진을 등록했다.
720여 종 2000여 장이 출품됐다. 이들 중 선정위원이 지역별로 나뉘어 책에 실릴 사진을 골랐다. 그러고는 핀(초점)이 나간 사진이나 화질이 좋지 않은 사진들을 배제하고 의미 있는 사진들을 선택해 편집에 들어갔다.
야생화 도록 『꽃 피던 날의 연서』 표지.
편집은 공통 작업이었다. 꽃이 피는 계절별로 봄·여름·가을로 분류하고 특히 종류가 많은 제비꽃과 백두산 야생화는 따로 묶었다. 꽃이 분류된 뒤 꽃에 대한 설명을 다는 작업에서도 집단 협업이 이뤄졌다. 정덕희씨를 비롯한 편집위원들이 꽃 설명을 올리면 회원들이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거나 좋은 표현을 덧붙이는 식이다. 학명 대신 꽃의 이름과 자생지, 개화 시기와 특성 등이 간략하게 정리됐다. 편집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표지도 네 가지로 만든 뒤 회원들 투표로 결정했다. 이 모든 과정이 석 달에 걸쳐 완성됐고, 12월 초 500여 종의 야생화를 담은 300쪽의 도록 『꽃 피던 날의 연서 』가 빛을 봤다.
동호회가 만들어낸 도록은 여느 전문가들의 식물도감 못지않았다. 야사모 회원인 서울대 김원찬(68·전기공학) 명예교수는 “야사모의 야생화 도록 출판은 전국 각지의 아마추어 애호가들이 적시에 야생화를 찾고 사진으로 찍은 뒤 객관적인 눈높이에 맞는 사진을 골라 설명까지 덧붙인 이른바 집단 지식작업”이라며 “개인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많은 이들의 머리와 힘을 모아 해낸 모범적인 사례”라고 평가했다.
암매 등 멸종위기종 지키고 싶어
야사모 회원들의 바람은 딱 한 가지. 예쁜 꽃을 오래도록 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야사모에는 ‘자생지 정보는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다. 도록을 만들 때도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회원이 너무 많다 보니 그중엔 야생화를 함부로 채취하는 사람들이 있어서다. 정주홍씨는 “서울 강동구에 경북 청송군 주왕산에서만 사는 둥근잎꿩의비름이 무더기로 심어져 있다”며 “ 야생화를 무단으로 채취해 옮겨 심는 바람에 자생지에서 더 이상 꽃을 볼 수 없는 경우도 적잖다”고 안타까워했다. 정덕희씨도 “화려하기로 유명한 얼레지는 보통 분홍색인데 드물게 흰 꽃이 있다. 꽃쟁이들이 그것을 찾아 헤매는데 사진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흰 꽃을 찍고 꺾어버리기도 한다”며 “사진보다 꽃이 더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다”고 꼬집었다.
걸을 힘만 있다면 언제까지고 꽃 사진을 찍으러 다니겠다는 이들의 다음 꿈은 암매나 단양 쑥부쟁이 등 멸종위기 식물들을 널리 알리고 지키는 것이다. “아직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안타까워하는 게 전부인데…. 이 또한 함께 머리를 맞대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도록을 만들며 집단 지식작업의 힘을 몸소 체험한 회원들의 눈이 또다시 빛나고 있다.
채윤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