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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부가 '후천개벽' 깨달음 얻은 계룡산 향적산방

라이프(life)/풍수지리

by 굴재사람 2012. 11. 2.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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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부가 '후천개벽' 깨달음 얻은 계룡산 향적산방

  • 글·사진 | 조용헌 동양학박사·칼럼니스트

 

 

▲ 20여 개의 봉우리들이 닭볏을 쓴 용의 형상을 닮았다 해서 계룡산이란 이름이 붙었으며, 계룡산은 하나의 통바위로 이루어진 기운이 넘치는 산이다.

인생 살면서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가 타이밍을 잡는 일이다.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 언제인가? 이것을 공자는 시중(時中)이라고 말했다. 50대 후반부터 14년 동안 밥 얻어먹으면서 떠돌이 생활을 경험했던 공자도 자기 인생에서 제일 어려운 게 ‘시중’이라고 고백했다. 주식을 사고 팔 때도 그렇지만, 지금 내 인생에서 ‘치고 나갈 때인가? 아니면 스톱할 때인가?’를 수시로 결정해야 한다.


그러자면 지금 내 인생이 몇 시인가를 아는 일이 어디 쉽던가! 개인사적인 측면에서도 시간표 알기가 어려운 문제인데, 이를 확대시켜 우주사(宇宙史)적인 차원에서 시간을 이야기한 인물이 있다. 구한말 계룡산 향적산방(香積山房)에서 도통한 김일부(金一夫,1826~1898) 선생이다. 일부(一夫)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의 우주적 시간이 선천(先天)이라면, 이제부터는 후천(後天)이라 규정했다. 우주사의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이 시작된다는 시간표를 제시한 셈이다. 주변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에는 이처럼 거대담론인 ‘후천개벽’ 이야기는 없다. 오직 한국에서만 있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로 보면 독창적인 거대담론이 아닐 수 없다. 우주시(宇宙時)가 변하면 역사시(歷史時)가 변하고, 역사시가 변하면 인간시(人間時)도 변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후천개벽이라는 우주시가 새롭게 열리면 우리 인간사회는 어떻게 변한다는 말인가? 필자가 1970년대에 계룡산파(正易派)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여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온다”, “앞으로 애기 낳기 힘들어진다”, “한반도는 세계사의 주역이 된다”, “기후변화가 온다” 등이다. 김일부를 계승한 정역파(正易派)의 예언 가운데 ‘수석북지(水汐北地), 수조남천(水潮南天)’이라는 내용이 주목을 끈다. ‘북쪽의 물이 빠져서 모두 남쪽 하늘로 몰려든다’는 뜻이다.


1970년대에 오대산의 탄허 스님이 국사(國事)에 대한 예언으로 유명했는데, 그때 그 양반이 심심치 않게 했던 이야기가 ‘앞으로 일본은 물에 가라앉는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이 물에 잠긴다’는 근거는 위의 ‘수석북지 수조남천’이다. 북극의 얼음물이 녹아 바닷물이 불어나면서 일본이 잠긴다는 추론을 한 것이다. 김일부의 독창적인 저술인 ‘정역’(正易)에서 나온 이야기인 것이다. 1970년대 일본이 가라앉는다는 예언은 작년에 일본 동북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을 보면서 ‘수조남천’이 현실적 무게감을 가지고 다가왔다. 동북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봐도 근세 100년 사이에 선천이 가고 후천의 개벽(Great open)이 온다는 우주사적인 변화를 예언한 예언자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매일 매일의 주식시세 예측은 많다. 그 시세 예측이라는 것도 대부분 맞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계룡산에서 5만년 단위의 예측이 나왔으니 이 어찌 독특한 일이 아니겠는가. 한국의 영발도사(靈發道士) 문화의 유구한 축적에서 나온 예언인 것이다.


▲ 초라한 판잣집 신세로 전락한 향적산방이 후천개벽의 사상체계를 완성한 장소라고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땅 기운이 뭉쳐 있는 영지에서 도통하기 쉬워
계룡산 향적산방을 찾아간 이유는 김일부가 도통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쓰레기를 매립한 난지도 같은 곳에서 도통하기는 어렵다. 영지에서 도통한다. 그래서 도사는 땅의 기운이 뭉쳐 있는 영지를 찾아간다. 계룡산은 산 전체가 영지이다. 산 전체가 통바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바위가 거대한 덩어리로 되어 있을수록 뿜어져 나오는 기운도 강하다. 바위의 기운이 강해야만 이 기운을 받아서 스케일이 큰 사상을 품게 된다.


‘계룡’(鷄龍)은 이름 자체부터가 특이하다. 어떤 의미인가. 닭은 시간이 되면 우는 동물이다. 새벽이 왔음을 알려준다. 때가 도래했음을 알려준다. 용은 어떤가. 조화를 부리는 영물이다. 힘이 있다.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면 ‘비룡재천’(飛龍在天)이다. 이때 온갖 재주를 부린다. 닭과 용을 합했다는 것은 ‘때가 오면 힘을 쓴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계룡은 ‘때’를 알리는 산이다. 후천개벽의 교과서인 ‘정역’(正易)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계룡산에서 나왔다. 지금부터 3,000년 전에 주나라의 문왕이 ‘주역’을 만들었다면, 3,000년 후에 계룡산에서 김일부에 의해 업데이트 판인 ‘정역’이 나왔다고나 할까.


향적산방은 계룡산 국사봉(國師峰) 올라가는 6부 능선쯤에 자리 잡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계룡산은 앞쪽이 바위 절벽이 솟아 있어서 닭의 머리로 본다. 닭은 벼슬이 있지 않은가. 솟은 암벽이 닭벼슬 모양으로 본다. 그 뒤쪽으로는 비교적 완만한 능선이 연산(連山) 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연산 쪽의 산줄기는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셈이다. 국사봉은 닭의 대가리와 용의 꼬리로 이루어진 전체 계룡산 가운데 중간 부위에 있다. 용의 엉덩이뼈 근처라고나 할까. 이 돌출된 용의 엉덩이뼈가 국사봉이라고 생각된다.


국사봉이라는 명칭도 재미있다. 우리나라 여러 군데에 국사봉이 있다. ‘국사가 나온다’는 뜻일까.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에는 국사(國師)나 왕사(王師)가 있었다. 조선시대로 오면서 불교는 직위해제되고 유교가 국교가 되었다. 조선시대의 국사는 ‘국지사’(國地師)를 뜻한다. 왕실 전용 지관(地官)이 국지사이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고승들이 담당하던 풍수지리의 영역을 과거시험에 합격한 중인층의 지관으로 대체했다. 지관 가운데 실력 있는 고수로 인정받으면 왕실 전용 지관으로 대접받았다. 이게 ‘국지사’이다. 조선시대에 생긴 국사봉들은 대개 국지사들이 왕실의 어명을 받고 그 지역으로 내려가 전체 지세를 관망하던 ‘뷰포인트’ 들이다. 왕자의 태(胎)를 담은 태실(胎室)을 미리 확보하기 위해서, 또는 전국에 특별한 명당이 어디에 있는지를 평소에 파악해 두기 위해서 왕실에서 국지사를 현장에 파견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국사봉이란 이름이 나오게 된 계기는 풍수지리를 보던 국지사들이 올랐던 봉우리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계룡산 국사봉은 전국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에 있는 국사봉이다. 전국 ‘국사봉의 왕’이라고나 할까. ‘국사가 나온다’는 뜻과, ‘국지사가 올라간 봉우리’란 뜻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 바위로 둘러싸인 향적산방 기도도량.

 

계룡산 국사봉은 전국서 최고 대접받아

김일부가 이곳 국사봉 자락에서 공부해 ‘정역’을 완성한 것도 범상치 않은 인연이다. 후천개벽의 새 도수(度數)를 짜는 국사가 나온 것 아닌가. 김일부가 공부한 향적산방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사항은 무엇인가. 우선 향적산방 터 앞의 안산(案山) 모양이다. 안산은 그 터 앞에 책상처럼 놓여 있는 산을 가리킨다. 터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 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안산이 어떻게 생겼느냐에 따라 발복(發福)의 유형과 장단이 다르다. 제일 좋은 안산의 모양은 일자문성(一字文星)이라고 한다. 한 일(一)자로 생긴 모습의 산을 말한다. 평평한 테이블처럼 생긴 모습이다. 이를 보통 토체(土體)라고도 부른다. 이런 모양의 안산이 있으면 군왕이 나온다고 본다. 그 집 앞에 토체 안산이 있으면 ‘여기는 군왕이 나올 곳이구나’하고 옛날 지관들은 짐작했다. 터만 보고도 그 집 주인의 격(格)을 아는 것이다. 전국을 돌아다녀 보면 이처럼 토체로 평평한 안산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토체는 왜 군왕의 모양인가. 우선 점잖기 때문이다. 사주팔자에 토(土)가 있어야만 신심이 있다. 토가 없으면 신심이 약하다고 본다. 신심은 상대를 믿는 마음이다. 따라서 팔자에 토가 많은 사람은 약속을 잘 지키는 경향이 있다. 토가 없으면 조삼모사(朝三暮四)가 될 수 있다. 신뢰는 토에서 나온다. 군왕은 신뢰를 주는 사람이다. 여러 사람에게 신뢰를 주고 믿음을 주어야 덕이 있는 것이고, 덕이 있다는 것은 신뢰를 준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은 군왕의 자질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의 모양도 토체로 되면 그런 터에서는 자연히 신뢰가 있는 인물이 배출된다고 여겼다. 물아일체(物我一體)요 산인쌍수(山人雙修)이기 때문이다. 산과 사람은 같이 팔자로 돌아간다고 보는 것이 동양의 세계관이다. 향적산방 앞에는 교과서적인 토체 안산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 눈 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내가 보기에 100만 달러짜리 안산이다.

 

또 하나는 청룡 백호가 짜임새가 있다는 점이다. 청룡과 백호는 형제간과 같다. 위기 상황에 빠졌을 때는 형제간이 도와주는 수가 있다. 청룡과 백호는 부도났을 때 가족 생활비 도와주는 형제간의 역할과 같다. 향적산방의 좌청룡과 우백호는 바위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확히 말하면 내청룡과 내백호에 해당한다. 이 바위맥이 양쪽에서 터를 감싸고 있는 점이 아주 아름답다. 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히 우백호 쪽의 바위는 그 모습이 용의 대가리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동네 사람들은 이 바위를 용바위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이 향적산방에는 바위가 많다. 산방 올라가는 초입에 길을 가리키는 안내간판이 있는데, 거북바위, 용마바위, 호랑바위가 있다고 써 있다. 세 가지의 바위가 있는 것이다. 거북바위는 산방 바로 옆에 있다. 넓적하면서 둥그런 바위가 있고, 그 바위 아래에는 서너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앉아서 명상을 하거나 기도하기에는 안성맞춤의 바위이다. 구전에 의하면 일부 선생이 이 거북바위에서 도통(道通)했다고 한다. 향적산방이 있게 된 계기도 바로 이 거북바위였던 셈이다.

 

일부 선생의 도통 내용은 무엇일까.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이 아니었을까. 이게 무슨 말인가. 일부의 스승이 있다.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奎)라고 알려져 있다. 이운규가 일부의 비범함을 보고 앞일을 예언한 시를 하나 주었는데, 그 구절이 바로 ‘영동천심월’이다. ‘그림자가 하늘의 달을 움직인다’는 의미이다. 이 구절을 받은 36세의 김일부는 밤이나 낮이나 그 의미를 궁구했고, 관촉사의 미륵불 앞에 나아가 항상 기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국사봉 아래로 옮긴 것이다. 그러니까 ‘영동천심월’의 의미는 김일부에 의해서 개벽사상으로 정립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영동천심월의 구체적 내용은 ‘정역’에 있다. 정역은 주역의 64괘와, 10간 12지, 60갑자, 그리고 한자문화권에서 전래되어 오던 고천문학(古天文學), 사서삼경, 풍수도참등이 용해되어 있는 데다가, 그것들이 종횡으로 씨줄 날줄로 정교하게 엮여 있어서 공부하기가 매우 어렵다.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고, 특히 동양고전과 역학에 어두운 현대인들로서는 무슨 암호나 난수표같이 막막한 느낌을 준다.

 

이운규의 스승도 있다. 조선 정조 때 규장각 사검서로도 활약했던 이서구(李書九)이다. 이서구는 유학자이기도 했지만 도가 쪽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은밀하게 도가 쪽 인물들과도 교류했으며, 이쪽 사이드에서 이서구에 대해 전승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는 도력을 지니고 있던 상당한 급수의 도사였다. 이서구의 사상적 스승을 소급해 올라가면 토정 이지함 선생이다. 토정의 맥은 결국 화담 서경덕까지 소급되는 것이다. 서화담에서 시작된 조선의 도맥이 토정, 이서구, 이운규를 거쳐 김일부에게까지 내려왔고, 구한말 국사봉 아래에서 ‘정역’으로 그 열매를 맺었다고 봐야 한다.

 

김일부는 서화담·토정·이서구 등의 맥 이어
일부 선생 당대에는 향적산방이라는 건물은 없었을 것이고, 이 이름은 경성제대 조선어학과를 나와 6·25전쟁 이후에 충남대에서 교수생활을 했고 후일 총장까지 지냈던 학산(鶴山) 이정호(李正浩,1913~2004) 선생이 이곳에 거처를 지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전쟁 이후의 어수선하고 배고픈 상황에서도 학산은 여기에 집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1950년대 중반부터이다. 대략 40~50명의 제자들이 여기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필자가 ‘정역’을 배운 삼정(三正) 권영원(權寧遠,1928~ ) 선생도 당시에 향적산방에서 이정호 선생을 모시고 정역 공부를 했었다.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냈던 고(故) 류승국 선생도 이때 학산 선생 밑에서 공부하던 멤버였다.

▲ 계룡산 입구에서 향적산방으로 올라가는 이정표가 커다랗게 안내하고 있다.

 

구한말 김일부의 맥이 동학과 일제 36년을 거치면서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지하에서 이어져 오다가 6·25전쟁 이후 비로소 이정호를 통해 지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당시 20~30대의 팔팔하고 영민한 젊은이들을 모아서 밥도 해먹이고, 고전도 가르치는 독특한 아카데미가 국사봉 아래에서 형성되었다. 필자가 권영원 선생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이 시기에 향적산방에서 천문(天文)을 보는 법도 공부했다고 한다.

 

“어떻게 천문을 봅니까?”

 

“우선 잠이 없어야 해. 밤에 별을 보려면 새벽 3~4시까지 잠을 자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밤잠이 적어야지. 두 번째는 감기에 잘 걸리지 않는 체질이 유리했지. 별은 겨울에 잘 보여. 추운 겨울에 산방 바깥에 나와서 별을 봐야 하는데, 여차하면 감기 걸렸지. 그때야 뭐 오리털 파카도 없던 때니까. 세 번째는 시력이 좋아야지. 밤하늘의 희미한 별을 보려면 눈이 좋아야 보지.”

 

대략 1980년대 후반까지는 이정호 선생이 향적산방에 자주 머물렀기 때문에 배우는 제자들의 출입이 있었으나, 1990년대 들어오면서부터는 정역을 배우겠다는 학인들이 사라지면서 한산해졌다. 지금 세상에 누가 정역 배우겠다고 세간사를 때려치우고 산으로 들어가겠는가. 요즘은 산신기도 드리는 기도객들만 한두 명씩 찾아오는 형편이다. 건물도 초라하기 그지없다. 불교사찰이라면 돈을 들여서 단장을 했겠지만, 불교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교서원도 아닌 향적산방은 도와주는 사람도 없다. 춥고 배고픈 것이 도가(道家)의 노선이란 말인가? 후천개벽의 사상체계를 완성한 성지이건만 이제는 초라한 판잣집 신세가 된 것이다. 필자가 갔을 때는 판잣집 처마에 무시래기만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풍경이 가슴을 저몄다. 후천개벽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그 개벽의 중심 성지는 아무도 보아주는 사람 없이 초라하게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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