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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주술의 결합 ‘도솔암 마애불’

라이프(life)/풍수지리

by 굴재사람 2012. 11. 2.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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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주술의 결합 ‘도솔암 마애불’

  • 글·사진 | 조용헌 동양학박사·칼럼니스트

 

 

영호남의 관계는 미묘하다. 상충되는 것 같으면서도 보완적인 측면이 있다. 백두대간의 주맥은 경상도로 흘렀다. 경상도가 등뼈 역할을 한다. 경상도가 척추뼈에 해당된다고 하면 전라도는 아랫배가 된다. 창자와 위장을 비롯한 내장은 전라도에 있는 셈이다. 척추가 자세를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면, 창자와 위장에는 먹을 것이 들어가서 소화를 시켜줘야 한다.


수천 년간 호남은 한반도의 먹을 것을 제공하던 지역이었다. 한반도에서 물산이 가장 풍부한 지역이 바로 호남이었던 것이다. 풍수적인 관점에서 영호남을 보자면 ‘영골호육’(嶺骨湖肉)이라고 볼 수 있다. 경상도는 산이 높고 많아서 농사지을 땅은 부족하다. 이에 비해 전라도는 넓은 들판이 깔려 있고, 남서해안가를 따라서 ‘뻘밭’이 널려 있다. 경상도는 ‘뻘밭’이 적은 편이다. 뻘밭은 바다의 밭인 ‘해전’(海田)이다. 육전(陸田)의 농작물이 흉년 들었다 할지라도 바다의 해전(海田)에는 흉년이 없다. 갈쿠리만 하나 들고 뻘밭에 나가면 조개도 잡고, 낙지도 잡고, 짱뚱어라도 잡는다.


뻘밭에서 일하는 돌쇠를 ‘갯땅쇠’라고 불렀다. 뻘은 갯가의 땅인 것이다. ‘갯가의 땅’을 줄이면 갯땅이 된다. 뻘밭을 끼고 있는 전라도의 해안가 사람들은 갈쿠리만 하나 들고 있으면 굶어 죽지는 않는다. 남해안으로 연결된 경남은 상황이 전라도와 비슷하지만, 동해안으로 연결된 경북 쪽은 바다로 멀리 나가면 망망대해 태평이다. 뻘밭도 없을뿐더러 멀리 나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육지의 들판과 해안가의 뻘밭을 보유하면서, 중국대륙이라는 세계의 제국으로 통하는 해로를 아울러 지니고 있는 곳이 호남이다.


▲ 선운산 바위맥의 끝지점에 도솔암이 있고, 바로 그 아래에 마애 미륵불이 있다.

바다를 통한 물류의 흐름은 제국인 중국으로부터 사람과 정보가 제일 먼저 들어온다. 풍부한 물산과 첨단 정보의 종합은 호남을 혁명의 발원지로 키웠다고 본다. 절대적인 빈곤상태에서는 혁명도 못 한다. 절대 기아상태에서는 체제전복 시도가 불가능하다. 최소한의 먹을 것이 있어야만 반체제도 가능한 것이다.


개성이나 한양 같은 한반도의 중심체제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다면, 호남에는 물산과 물류의 기지가 집중되어 있었다. 중심부를 위협하는 대항세력의 거점은 자연히 돈이 있고, 정보와 사람이 몰려서 살던 호남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그렇다. 지형적 차이는 기질과 행태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무래도 먹을 것이 풍부하면 심리적으로 여유가 있기 마련이고, 그 여유는 의식주 문화 전체에 나타난다. 판소리, 한정식 요리, 의상, 주택 구조, 인간관계 방식, 발효음식, 성격과 기질이란 부분에서 호남은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 지역인 것이다.


호남엔 물산과 물류 기지 집중돼 사람 몰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을 보자. 동학의 원료는 최수운(崔水雲)이 경주(慶州)에서 제조했다. 수운은 경주에서 태어나 잔뼈가 굵은 경상도 사람 아닌가. 그런데 이 동학이 폭발한 지점은 전라도이다. 화약제조는 경상도에서 했다. 그 화약이 경상도에서 폭발하지 않고 전라도에서 대폭발했다. 물건은 경상도에서 만들었지만 마케팅은 전라도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어떤 각도에서 해석해야 할까.


‘왜 동학이 만들어진 경상도에서 폭발하지 않았을까?’는 품어볼 만한 의문이다. 화약이 쌓여 있더라도 이게 폭발하려면 불씨가 있어야 한다. 성냥이나 부싯돌로 불을 붙여야 하는 것이다. 인화물질이나 불쏘시개가 있어야 한다. 그 부싯돌 역할을 한 장소가 전북 고창의 선운사 도솔암의 칠송대라는 암벽에 새겨진 거대한 마애불이다. 약간 황토색이 들어간 바위벽에 음각과 양각을 혼합해 새긴 약 14m 크기의 마애불이다. 최근 들어서 미술사학자들이 절벽 단애(斷崖)에 새겨졌다고 하여 미술사적으로 마애불이라고 하지만 원래 이름은 미륵불이고, 미륵불이 맞다. 마애불은 족보가 없는 이름이다. 아마 천년도 넘게 미륵불이라 불렸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이 검단선사(黔丹禪師)에게 부탁해 새긴 부처님이라고 한다. 선운사는 백제시대부터 있었던 절이니만큼 검단선사가 새겼다는 전설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여간 백제시대부터 있었던 사찰의 절벽 미륵불이 동학의 부싯돌 역할을 했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오지영의 <동학사>를 보면 도솔암의 미륵불에 숨겨진 비결(秘訣)을 꺼내기 위해서 손화중의 포(包)에 속한 접주들은 회의를 갖는다. 도솔암 미륵불의 명치 부위에 미래세상의 변화를 예언한 예언서, 즉 비결이 감추어져 있는데, 이걸 꺼내는 사람이 새로운 용화세계의 주인이 된다는 전설이 있었던 것이다.


▲ 선운산 마애 미륵불의 모습. 동학의 손화중이 배꼽에 봉인된 미륵불 비결서를 꺼낸 것으로 전해진다.

미륵불의 명치 부위는 약 15~16m에 달하는 높은 절벽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위치다. 통상 불상 속에는 복장(腹藏)이라고 하여 불상을 처음 조성할 때에 다라니 경전이나 금붙이, 또는 귀중품을 불상의 배 안에 넣어두는 풍습이 있다. 바위에 새겨진 미륵불이지만 여기에도 ‘복장’을 넣어두었던 것이다. 처음 미륵불을 조성할 당시에 미륵불의 오목가슴 부위를 사발만 한 크기로 둥그렇게 파낸 다음, 여기에다가 비결서(秘訣書)를 복장 대신으로 집어넣어 두었다는 이야기가 천년이 넘게 쭉 전해 내려왔던 모양이다. 민초들 사이에서는 이 미륵불의 비결이 꺼내지면 한양이 망하고 새 세상이 시작된다는 믿음도 같이 이어져왔던 듯하다.


미륵불은 새 부처님을 뜻한다. 석가불이 죽은 부처라면 미륵불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부처님이었으므로, 미륵불이 출세한다는 것은 곧 낡은 세상이 끝나고 새 세상이 온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미륵불은 곧 혁명하는 부처님, 즉 ‘혁명불’(革命佛)로 인식된 것이다. 종교적인 구세주가 혁명을 부추기는 지도자가 되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유교를 정도로 생각했던 조선시대에 불교의 미륵불은 위험한 신앙이요, 정권을 뒤흔드는 반체제의 신념체계였다.


1894년 당시 동학의 3대 지도자라고 하면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을 꼽을 수 있다. 해월(海月)의 지도를 따른 이북지역의 북접(北接)을 빼고 이남의 남접(南接)만 가지고 하는 이야기이다. 전봉준은 동학의 얼굴마담이자, 전체 전략을 이끌었던 전략가형 지도자였고, 김개남은 가장 전투적이었던 무장 대원들을 이끌었던 행동 대장형이었고, 손화중은 지역사회의 인심을 얻었던 재력가이자, 조직가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혁명이 되려면 초기 단계에 인원동원이 필요하다. 사람이 모여야 힘이 생긴다. 주변의 인망을 얻은 손화중에게 사람들이 따랐고, 손화중은 이 사람들을 도솔암 미륵불 아래로 집결시켰던 것이다.

 

인심 있던 손화중이 미륵불 봉인 개봉 나서

드디어 미륵불의 배꼽에 숨겨져 있는 천고의 비밀을 연다. 이 소문이 고창, 정읍 일대를 진동시켰다. 전화도,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에 입소문으로 전해진 이 빅뉴스를 듣고 적어도 수백 명의 대중이 도솔암 미륵불 아래 모였다. 일설에는 이때 모인 인원이 300명쯤 되었다고 한다. 시기는 동학혁명 1년 전인 1893년 가을이었다. 신성한 미륵불의 복장을 털려고 동학도들이 모이니 선운사의 승려들은 당연히 반대했다. 신성 모독이었으니까. 그러나 동학도들은 승려들을 한 군데로 밀쳐서 새끼줄로 묶어 놓고 청죽 수백 개와 새끼줄 수십 타래를 가지고 갔다. 이걸로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서 절벽을 올라간 다음, 이 거대한 미륵불의 명치(배꼽) 부위에 봉인되어 있던 석회 덩어리를 뽑아내었다.

 

당시에 이 비결서를 꺼내면 벼락이 친다는 속설이 있었다. 18세기에 전라감사를 지냈던 이서구(李書九)가 미륵불의 배꼽을 열었는데, 거기에서는 책이 한 권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책을 꺼내는 순간 뇌성벽력이 하늘을 찢는 소리가 났고, 혼비백산한 이서구가 다시 책을 집어넣었다는 구전이 전해내려 왔었다. 이때 이서구가 엉겁결에 본 것은 ‘全羅監司 李書九 開坼’(전라감사 이서구 개탁)이라는 글자뿐이었다고 한다.


▲ 바위 위에 있는 선운산의 도솔암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그 뒤로 벼락이 무서워 함부로 이 미륵불 배꼽을 열지 못하다가, 손화중이 천하의 난세가 다가왔음을 감지하고 다시 한 번 배꼽을 열어볼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손화중이 배꼽을 열고 과연 어떤 내용의 비결서를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손화중이 미륵불의 비결을 꺼내서 입수했다더라. 거기에는 세상이 바뀐다는 내용이 있다더라. 이제 난리가 나는 모양이다더라’ 등의 소문이 호남 일대를 휩쓸었다.

 

 

동학도가 천지개벽의 비결을 입수했다는 소문은 전라도 사람들을 들뜨게 만들었다. 일대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수개월 사이로 손화중 포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전봉준은 앞에 내세워진 지도자였지만, 뒤에서 병참 역할을 담당하며 사람들을 얼기설기 조직하는 역량이 탁월했던 지도자는 손화중이었다. 그만큼 신망이 두터웠던 인물이다. 호남 동학의 초기 폭발은 손화중이 미륵불의 배꼽 비결을 꺼내면서부터였다고 해석하고 싶다. 이렇게 본다면 동학의 폭발은 미륵불의 배꼽 비결에서 발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년 넘게 이어져온 호남 지역 미륵신앙이 도솔암 미륵불을 매개로 하여 동학으로 이어진 것이다. 절벽의 거대한 미륵불이 낳은 자식이 동학인 셈이다. 도솔암 칠송대의 미륵불은 한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부처님이다.

 

 

미륵불과 미륵신앙은 경상도에도 많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전라도의 미륵불에서 혁명에 동참하는 대중들의 동원이 이루어졌을까? 거시적으로 보면 이는 신라의 미륵신앙과 백제의 미륵신앙이 같은 미륵이지만, 신앙형태는 달랐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신라는 통일 전후에 미륵이 집권층과 상류층의 신앙으로 정착되었다. 화랑들을 다른 이름으로 ‘미륵선화’(彌勒仙花)라고 불렀다. 미륵이 변해 화랑이 된 것이다. 화랑은 통일전쟁의 주류였고, 신라사회의 지배계층이었다. 따라서 미륵은 신라의 지배계층을 뒷받침해 주는 체제이념으로 갔다.

 

이에 비해 백제는 망했다. 미륵이 지하로 내려간 것이다. 핍박받는 민초들의 신앙이 된 것이다. 그래서 구 백제, 특히 호남지역의 미륵불들은 대개 ‘하체매몰불’(下體埋沒佛)의 형태가 많다. 돌미륵이 반쯤은 땅에 묻혀 있고, 반쯤은 지상에 드러나 있는 형태의 미륵불상이 ‘하체매몰불’이다.

  

김삼룡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호남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이러한 형태의 미륵불은 땅 속에서 미륵불이 솟아 나오고 있는 상황을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 하늘에 존재하는 미륵불이 아니라 땅속에서 힘겹게 지상으로 솟아 나오는 미륵불은 핍박받는 민초들의 심정을 대변하기에 딱 맞는 콘셉트였다. 땅은 밑바닥이고 민초를 상징하고, 힘겹게 사는 계층과 이미지가 부합된다. 그러다보니 호남의 미륵불들은 민초들의 염원을 대변하는 부처님이 되어 버렸고, 시대적 전환기가 될 때마다 혁명적인 구세주로 둔갑했다고 보인다.

 

호남 미륵신앙의 3대 사찰을 꼽는다면 익산의 미륵사와 김제의 금산사, 그리고 고창의 선운사이다. 3개 사찰의 공통점은 쌀 수확이 풍부한 곡창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익산 미륵사는 함열, 강경 평야지대이고, 금산사는 김제, 만경 평야지대이다. 선운사도 역시 부안, 고부 일대의 곡창과 근접해 있다. 이 세 지역은 부속 곡창지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할 커다란 호수도 가지고 있었다. 호남 ‘3호’(湖)라고도 부른다. 미륵사 옆에는 주변 80리 크기의 황등제(黃登堤)가 있었고, 금산사는 벽골제(碧骨堤)가 뒷받침을 해주고 있었고, 선운사 주변에는 제방길이 1.5km, 주변 약 16km 규모의 삼한시대 축조한 눌제(訥堤)가 있었다.

 

평야지대의 기준에서 보면 미륵사나 금산사보다 선운사가 약간 떨어지는 조건이지만 줄포만이라는 바다를 바로 옆에 끼고 있다는 점에서는 훨씬 조건이 좋았다. 줄포만은 고대 해상물류의 요충지였다. 중국과 일본으로 가는 배가 여기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육지로 쑥 들어오는 만(灣)은 배가 드나들기에 좋은 조건이다. 바람이 불어도 파도가 적고, 육지의 집산물을 배로 선적하기 좋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선박을 통한 해로는 고대의 고속도로였다.

 

따라서 선운사는 변산반도 일대의 물류가 집중되는 줄포만과 붙어 있다시피 해서 해상세력의 거점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더군다나 줄포만 일대에는 고대의 현금과 같은 역할을 했던 천연 염전(鹽田)지대이다. 이 염전의 기원은 백제의 검단선사 때부터 조성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선박을 통해서 정보와 돈이 들어오고, 염전에서 돈 들어오고, 육지의 평야지대에서 쌀 들어오던 요충지의 사찰이 바로 선운사였던 것이다.

▲ 동양학 박사 조용헌씨가 도솔암 스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역사적 자료는 없고, 구전으로만 전해져오는 정보에 의하면 선운사는 조선후기 반체제 비밀 결사 승려들의 조직인 당취(黨聚)들의 거점 사찰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영광 불갑사(佛甲寺) 해불암(海佛庵)에 주석하던 금화(錦華) 스님이 당취 대장이었고, 그 당취들의 훈련도장이 바로 선운사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금화는 전봉준에게 병법을 전해준 스승이기도 했었기에, 동학 때에도 동학군들이 해불암은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했다고도 한다. 어찌되었든 선운사는 해상 교통의 요지여서 당취들이 비밀리에 모이기 쉽고, 관군의 공격이 있을 경우에는 신속하게 탈출하기에도 좋은 지점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종합하면 고창 선운사는 호남평야의 쌀과 변산반도 일대의 해상물류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미륵사찰이었다. 호남 서해안 일대의 가장 번성했던 절이 선운사였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이 미륵신앙은 난세가 되면 변혁운동의 중심에 서기 좋은 사상체계였다. 한국 미륵신앙의 중흥조인 진표율사. 그가 몸을 절벽에 두 번이나 내던지는 목숨을 건 수행 끝에 도통한 수행 터인 부사의방(不思議房)도 변산 마천대(摩天臺) 절벽 중간에 있다. 부사의방과 선운사는 직선으로는 아주 가까운 거리이다. 도솔암 미륵불은 이러한 호남의 풍요로움과 해상물류, 그리고 뻘밭, 지하로 들어간 미륵신앙이 천년 이상 켜켜이 시루떡처럼 결집되어 있던 지점이었다고 본다. 바로 그 지점에서 동학이 최초로 폭발했으니 이는 우연이 아니다. 역사적 인과의 축적에서 이루어진 폭발인 것이다.

 

풍수적으로도 선운산의 바위맥이 구불구불 갈지(之)자로 내려오다가 끝에 뭉친 지점이다. 바위맥의 끝에 기운이 뭉쳐 있다. 금상첨화인 것은 이 바위맥의 끝지점을 주변의 산들이 병풍처럼 감싸주고 있다는 점이다. 기운이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역할이다. 흐르는 계곡물도 방향이 좋다. 서출동류(西出東流)인 것이다. 서쪽에서 시작해 동쪽을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일조량을 가장 풍부하게 받는다. 산소 함류량이 많은 물은 명당수(明堂水)이다. 그래서 풍수가에서 가장 좋게 보는 물이 서출동류이다.

 

선운사 전체를 보면 멀리 외곽으로는 인촌강(또는 풍천)이 둘러싸고 있다. 인촌강은 밀물 때면 바닷물이 내륙 3~4km까지 거슬러 올라오고, 썰물이 되면 다시 바다로 빠진다.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서 기운을 모아 인물을 만들어 낸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강은 또한 명당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 인촌강 뻘밭 속에 향나무를 묻어 놓았다. 수백 년이 지난 후에 꺼내면 이 향나무는 나무 전체가 침향(沈香)이 된다. 미륵불이 출세하는 시기에 쓸 침향을 미리 저장해 놓았던 것이다. 이 동네가 고향인 시인 서정주는 인촌강에서 침향 올라오는 모습에 대해서 시를 쓰기도 했다.

 

선운사 도솔암 미륵불은 이러한 명당수가 내외로 둘러싸고 있는 형국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명당에서 인물이 나고, 영험한 영발(靈發)이 생기고, 이 영발이 축적되면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담당한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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