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현의 시시각각] 올레길, 둘레길, 바우길
‘생태’라고 하면 얼큰한 찌개부터 떠올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온 국토가 생태(生太) 아닌 생태(生態) 열풍에 빠져든 지 벌써 한참 됐다. 특히 ‘생태 길’이나 ‘탐방 길’ 같은 걷기 코스를 한두 군데라도 안 거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올해 8월 말 개방된 북한산 둘레길은 9월에 60만 명, 지난달엔 57만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두 달에 117만 명. 정말 겁나는 열기다. 어디에 뭐 하나 생겼다 하면 기어코 찾아가 ‘인증 샷’을 남겨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유별난 성미를 지적해야 하나. 교통신호등이 필요할 만큼 왁자하게 붐비는 휴일의 북한산을 생각하면 앞을 막는 무엇이든 해치고 먹어치운다는 아프리카 군대개미가 연상되는 것도 사실이다. ‘제발 조용히…. 이곳은 마을을 통과하는 구간입니다. 마을 주민의 주거생활 보호를 위해 조용히 둘레길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북한산국립공원사무소장 이름으로 된 ‘호소문’을 읽을 때마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탐방객들의 무례와 몰염치에 화가 저절로 치솟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연민이다. 나를 포함해, 북한산 그늘에 사는 수도권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의 소박한 꿈이라는 게 “이번 주말엔 북한산이라도…” 정도 아닐까. 그런 마당에 둘레길이라는 신상품이 생겼으니 대박이 터지고 한쪽으로 사달이 나는 것도 이해할 만하지 않은가. 배낭 메고 군인 행진하듯 앞 사람 뒤통수만 바라보며 내딛는 발걸음 덕에 그나마 세파에 찌든 마음들이 펴진다면 쓰레기나 소음, 노상방뇨 추태는 곧 사라질 소수의 일탈로 보아 넘길 수 있겠다.
범국가적 ‘걷기 열풍’의 원조라면 단연 제주 올레길이다. 36일간 스페인 ‘순례자의 길’ 800㎞를 걷고 돌아온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2007년에 시작했다. 이곳도 최근 생태계 훼손을 걱정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서 이사장은 “특정 코스에 사람이 몰리는 게 문제”라고 진단한다. 22개의 올레길 중 6·7·8 코스, 특히 접근성이 좋은 7코스가 몸살을 앓고 있단다. 올레길이 널리 알려지면서 여행사들이 단체여행객들에게 30분~1시간짜리 ‘토막 올레’ ‘맛보기 올레’를 권장하는 통에 진짜 올레꾼들은 “거긴 사람이 너무 많다”며 기피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인위적으로 통제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서 거품이 가라앉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했다.
정작 큰 문제는 여행객보다 ‘관청’이라고 서 이사장은 주장한다.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의 ‘생이기정 길’이 한 예다. 불과 700m의 길에 2억7500만원이나 들여 현무암 판석을 깔아놓았다. “올레길은 주변 나무 하나 다치지 않게 삽과 곡괭이만으로, 일부러 한두 사람만 지나게끔 폭 1m 미만으로 조성했다. 그런데 그 많은 돈을 길에 바르다시피 하다니 말이 되나. 돈 얘기라 뭐하지만, 우리가 350㎞ 넘는 총 22개 코스를 개발하면서 보조받은 돈이 코스당 900만원꼴이고, 그것도 대부분 팸플릿과 코스 개장식 비용이었다.” 서 이사장은 지자체들이 걷기 열풍에 합류하면서 실적에 목마른 공무원들의 비위를 맞춰 예산의 ‘단물’을 노리는 사람들이 전국을 들쑤시고 다닌다며 씁쓸해했다.
소설가 이순원씨가 뜻 맞는 산악인과 대관령·경포대·정동진을 누비며 개척한 ‘바우길’에 대한 지자체의 냉대는 일종의 미스터리다. “지난해 여름부터 아무 지원도 받지 않고 걸어다니며 150㎞의 트레킹 코스를 개발했더니 다른 단체가 비슷한 길을 자기네가 개척했다고 나서는가 하면, 강릉시는 표지판 같은 기본적인 행정서비스조차 나 몰라라 하더라”고 이씨는 하소연했다. 누가 옳은 것일까.
호젓하게 걷는 길을 내고 잘 유지하는 일은 토목 아닌 문화사업이다. 관청이 너무 나서면 오히려 망친다. 관 주도로 생긴 그 많은 지역 축제들이 우수수 스러지는 것을 보라. 문화를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 길이 원칙’은 둘레길·올레길에도 적용돼야 할 것 같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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