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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마'에서 배우는 인생

라이프(life)/레져

by 굴재사람 2010. 11. 9.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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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춘마'에서 배우는 인생

 

 

마라톤은 하나의 인간극장이며 드라마다. 누구나 인생에서 어려움과 위기를 겪듯이 마라톤에서도 그런 고비를 피할 수 없다. 세계적 엘리트 선수들이나, 그들보다 몇 시간 늦게 결승점에 들어오는 우리들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42.195㎞라는 긴 여정을 통해 우리는 인생을 배운다.

초반 5㎞ 지점까지 살얼음판을 디디듯 조심스럽게 그날의 페이스를 점검한다. 이것이 인생의 출발과 같은 마라톤의 시작이다.

10㎞ 지점까지는 "오늘 왜 이렇게 컨디션이 좋은가"할 정도로 스스로 감탄하며 경쾌하게 달린다. 우리의 청춘, 우리의 20대와 같다. 모든 것을 이뤄낼 것 같고, 자신감이 하늘을 찌른다. 내 청춘의 모습도 바로 그랬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시절은 너무 빨리 지나간다. 15㎞ 지점이 되면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뛰는 속도가 느려지고 몸이 축 처지기 시작한다. 노란색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그리고 첫 번째 고비가 온다. 인생 40을 전후해 한 번의 큰 위기가 찾아오듯 25㎞ 지점에서 우리는 여지없이 위기와 마주 서야 한다. 온몸이 무거워지다 못해 뻣뻣하게 굳어온다. 속도를 늦춰보기도 하고 걸어보기도 한다. 과연 오늘 끝까지 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한꺼번에 엄습한다. '나는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 것인가.' '회사에서 퇴출당하지 않고 버텨낼 수 있을 것인가.' '지금 가는 길이 내가 갈 길이 맞는가.' 가슴과 어깨를 인생의 무게가 짓누르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그러다 보면 드디어 마라톤 '마(魔)의 구간'에 진입한다. 30~35㎞ 지점이다. 중급 마라토너라면 보통 출발 후 두세 시간 뒤에 만나는 구간이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사서 고생하는가. 물 마시고 바나나 하나 먹고 딱 5분만 쉴 수 있으면 좋겠다." "마라톤은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부터는 이런 고생은 절대 다시 안 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어디에라도 그대로 푹 주저앉아 버리고 싶어진다. 집중력도 현저히 떨어진다.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평소 같으면 생각도 나지 않을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간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더 이상 주저앉을 순 없다는 생각이 번쩍 든다.

정신 차려 고개를 들어보면 응원 구호가 보인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려야 한다.' 장거리 육상의 전설인 체코의 자토벡이 남긴 말이다. 결국 인간은 달려야 한다. 마치 인생처럼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며 원망과 후회하며 달리는 것이 바로 마라톤 아닌가.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마라톤은 마지막에 놀라운 반전의 각본이 준비된 드라마이다. 35㎞를 넘어가면서 피로감이 조금씩 사라진다. 뛰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작은 기적'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몸속에서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일지도 모른다. 어떤 전문가들은 인체가 스스로 겪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통증 제거 호르몬을 스스로 분비한다고 말한다. 어떤 전문가는 근육 속 피로물질이 자체적으로 타서 에너지를 발생시킨다고 설명한다.

어떤 이유이든 우리는 인체 기능의 놀라운 회복력을 발견한다.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돼 있지만 마음은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이것은 폭풍과 풍파를 거쳐 평온을 되찾는 인생의 노년과 같다. 바로 관조(觀照)의 경지에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몸은 다시 초반 5㎞의 스피드를 회복하기에 이른다.

온갖 고통을 다 겪고 드디어 '40'㎞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온몸에 희열을 느끼게 된다. 가슴은 요동치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어느새 눈에 들어오는 41㎞ 팻말. 그러나 한순간 후회와 아쉬움이 몰려온다. '내가 왜 이렇게밖에 못 달렸는가.' '아까 좀 더 힘을 내 달렸으면 결과는 달라졌을 텐데….' 회한에 사무친 채 대단원을 향해 돌진한다. 그러고 보면 인생도 마라톤처럼 황혼에 이르러서는 누구에게나 후회와 유감으로 마감되는 게 아닐까.

마라톤이란 건강한 정신과 신체의 각 부위가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어울리는 선율 같은 것이다. 그 깊은 경지에 취하는 것이 바로 마라톤의 황홀경이다.

춘천에서 경험하는 마라톤은 더욱 특별하다. 그 준비가 참으로 정갈하고 품격이 있다. 단풍진 산과 춘천 공지천 호반을 수놓는 마라도너들의 물결…. 국내·외 유수 마라톤 대회를 수십회 뛰어봤지만 춘천을 능가할 대회는 세계적으로 별로 없다. 그래서 지난달에도 어김없이 춘천을 찾고 말았다.

아스팔트 위에서 만나는 인생, 그 교훈을 음미해 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가급적 중년 이전에 마라톤을 경험해 보면 자신의 삶의 계획을 세우는 데 많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마라톤을 3~4회 정도 거듭하면 자신의 연비와 속도를 대강은 파악할 수 있다. 거기서 한 시간 정도 속도를 늦추면 그것이 바로 건강마라톤이다. 조금은 답답할 것 같지만 부상당하지 않고, 무리하지 않고 완주하는 것. 이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와 같다. 그래서 마라톤이 바로 인생 그 자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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