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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산에 오르는 꿈을 꾼다

라이프(life)/레져

by 굴재사람 2010. 11. 3.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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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그래도 나는 산에 오르는 꿈을 꾼다

배석형 / 수필가

"푹신푹신한 낙엽을 밟는 감촉을 발바닥에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늘 꿈이다… 산에서 다치고도
아직 산타령이냐고 말한다 내가 평생 산에 오를 수 없어도
산을 향해 열린 내 마음은 영원히 닫히지 않을 것이다"


배석형 / 수필가
눈을 감는다. 돌부리에 차이고 힘에 겨워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늘 꿈이다. 눈은 진동성 사시여서 초점이 안 잡혀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혼자 걷지도 못한다. 그래도 나는 산에 오르는 꿈을 꾼다.

1980년 가을, 나는 오랜만에 홀가분하게 혼자만의 산행을 즐기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직 신입사원 티를 벗어나지 못한 스물다섯 나이였다. 태릉 쪽에서 불암산 정상을 오른 뒤 상계동 쪽으로 내려갔다. 바위에 실낱같이 흐르는 물을 뜨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순간, 발이 미끄러졌다. 몸이 몇 바퀴 굴렀다. 왼쪽 팔목이 삔 것 같았고 머리에 피가 조금 흘렀다. 별다른 부상이 아닌 줄 알고 가까운 접골원에 갔다. 그러나 팔이 삔 게 아니라 복합 골절된 것 같다며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의사는 머리 엑스레이부터 찍었다. 뇌출혈이 심해서 앞으로 두 시간 이내 수술해야 된다고 했다. 수술해도 살아날 가능성은 20%도 안 되고 설령 살아난다고 해도 기억상실증에 걸리거나 식물인간이 될 것이라 했다. 병실에서 어머니를 본 순간 "걱정시켜 드려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이내 의식을 잃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50여일이 지나서였다. 뇌신경마비였다. 게다가 시신경마저 손상되었다. 6년이나 사귀었던 여인은 "살아남은 게 다행"이라며 눈물만 흘렸다. 그녀는 직장에 휴직계를 내고 6개월간이나 내 곁에서 대소변을 받아내며 수발을 들어주었다. 차도가 없었다. 나는 괜히 투정하고 신경질만 부렸다. 어머니는 내게 그녀를 떠나보내라고 했다. 라디오에서 프란시스레이 악단의 '어느 사랑의 종말을 위한 협주곡'이 흘러나오던 어느 날, 그녀를 내 곁에서 놓아주었다.

그때부터 3년간 나는 집안 구석에서 누워 지냈다. 겨우 바깥 공기를 마시며 지낸 게 어느덧 30여년이 흘렀다. 그 긴 시간을 좌절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등산 덕분이다.

나는 가만히 누워서 지도를 펴놓고 예전에 했던 산행 기억을 더듬는다. 그냥 단편적으로 기억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배낭 꾸리기부터 시작해서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실제 산행하는 것과 거의 같은 속도로 상상을 이어나간다.

'상상 임신'을 한 여자는 헛구역질을 한다고 한다. 나도 낙엽이 푹신푹신하게 느껴지는 그런 감촉을 발바닥에 느끼며 바위를 건너뛸 때면 나도 모르게 발을 툭 차 올리곤 한다.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던 것은 대학시절 울릉도에 갔을 때의 추억 때문이었다. 바위 틈새에서 바람이 부는 '자연 에어컨'이라고 하는 곳을 그냥 지나쳐 온 게 너무 아쉬었다. 그 뒤 어딜 가더라도 기초 자료를 모두 조사하고 떠났다.

치악산을 갈 때면 영원사 아래에서 야영한 뒤 남대봉으로 오르는 갈림길에서 꼭 오른쪽 길을 선택한다. 1980년 여름 나는 직장 동료들과 함께 치악산에 오르다 앞서 가던 동료가 왼쪽 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모두 가시덤불 속으로 빠져들어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한 탓이다.

계룡산을 향해 떠난 나는 동학사를 둘러본 뒤 금잔디고개에 오른다. 어디로 내려갈까 하고 잠시 망설인다. 자연성릉으로 갈까. 그러나 그 길로 가면 6~7시간 걸리기 때문에 다음 기회에 가겠다고 마음먹는다.

산악잡지인 월간 '산'에 이런 내 얘기를 독자투고에 보냈더니 어느 한 여성이 소식을 보내왔다. "7월 30일 지리산에 갈 예정입니다. 내가 앞장설 테니 뒤에 따라오세요." 약속한 날, 나는 상상 속에서 그녀와 함께 산을 탔다. 그러곤 일주일 뒤 그녀가 보내온 편지를 읽었다. '심원~달궁 간의 아름다운 오솔길을 걸었어요. 그런데 성삼재 도로공사를 하면서 나온 깨진 돌들이 길에 마구 채워져 있어 너무 슬펐어요. 아마도 배석형씨의 추억 속의 지리산은 이보다 한결 더 아름다울 거예요.'

산은 산을 사랑하고 찾는 사람들의 것이다. 그런 이들이 진정한 의미의 산악인이다. 상상으로만 산을 그리며 지내지만, 나도 감히 산악인이라 말하고 싶다. 다치고 난 뒤에 산에 대한 지식과 산행의 체계적·학술적 지식은 오히려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산에서 다치고도 지겹지 않으냐", "혼이 나고도 아직 산만 생각하느냐"며 나무라기도 한다. 그러나 산이 좋은 걸 어쩌랴. 산이 주는 고마움, 등산의 맛과 멋을 아는 내가 어찌 산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겠는가.

난 '상상 등산'을 하며 한 번도 좌절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사실 여든이 넘은 노모에 얹혀사는 내가 좌절했다면 나는 살아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멍청하게 세상을 살아 지금껏 살았는지도 모른다.

한때 혼자 거리를 다닐 정도였지만 7년 전 지하철 승강장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이젠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를 타야 외출을 한다.

지금은 글 한번 쓰려고 컴퓨터 자판 한 개 누르려면 5초 이상 걸린다. 그 순간에도 몸이 뒤틀린다. 그래도 그런 손으로 '아픈 것이 반갑다'란 수필집을 내기도 했다.

나는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산에 오르고 싶다. 우선 근처의 약수터부터 시작해 내가 사랑하는 지리산에 다시 오르고 싶다. 그러나 평생 산을 오를 수 없다 해도 산은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산을 향해 열린 내 마음의 창은 영원히 닫히지 않을 것이다.




출처 : 조선일보 201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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