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지식사회의 중심이동과 역학(易學)
1.
역학(易學)이라면 마치 점복(占卜)과도 같은 생활잡학 수준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럴 정도로 역학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선입관은 두텁다. 그러나 본래적 의미의 역학은 그런 것이 아니다.
역학(易學)은 이른바 사서삼경(四書三經) 공부의 마지막 과정이었다. 공자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공부한 것도 역학(易學)이었다. 책을 묶는 가죽끈이 세 번이나 달아서 끊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으면서 공자가 공부했던 것도 역학이었다. 역학은 우주의 이치, 존재의 비밀에 도전하는 최고, 최귀의 학문이기 때문이었다.
서양의 어떤 학문도 존재와 시공간의 동태적 상관관계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서양의 고대철학에서부터 근대철학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궁극성에 대한 고민의 편린은 있지만 시간과 공간의 이치에 바탕해서 우주와 존재의 생멸 그리고 변화의 원리를 체계화한 학문은 없다.
흔히 역학에서 天 地 人 삼재(三才)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공간과 시간 그리고 존재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보면 될 것이다. 시간의 코드가 지지(地支)이고 공간을 코드화한 것이 간지(天干)이다. 시간과 공간의 코드화, 그런 시도는 서양의 학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철학도 그렇고 천체물리학이나 생명과학에서도 그렇지만 마지막 열쇠는 시간과 공간의 비밀에 있다. 즉 시간과 공간과 존재의 상호연관성을 해명하는 문제인 것이다.
철학에서 곧잘 '세계의 보편적 상호연관성'과 '세계의 통일성'을 말한다. 그러나 존재와 시간과 공간의 상관관계를 통일적으로 포착할 수 없다면 그에 대한 해명은 불가능하다. 우주, 자연계의 운동에 대한 해명도 그리고 합법칙적 사회 역사적 실천에 대한 해명도 불가능하다. 바로 이점 때문에 易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
최근 미국이나 서구에서 역학에 대한 전문 연구자들이 생겨나고 있고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 대한 연구가 붐을 이루고 있는 현상들을 가볍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서구적 학문의 한계를 자각한 서양의 연구자들이 이미 역학방면으로 관심을 확장하면서 학문의 중심이동을 시작하는 그런 징후로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도 역학은 동양학 중에서도 21세기의 가장 경쟁력이 있는 학문이란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세계화라는 것은 미국과 서구적 가치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며 거기에 우리가 종속되는 형국에 처해 있다. 이러한 종속으로 인해서 우리 스스로 동양학을 업신여기고 편견의 장벽을 쌓으면서 역학의 학문적 가치를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의 이러한 문화적 종속을 극복할 수 있는 학문, 근대적 가치를 넘어설 수 있는 그리고 지식사회의 미래적 학문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易學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역학은 철학자들만이 해야할 공부가 아니다. 자연과학이나 의학에서도 그리고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서 반드시 필요한 학문이다. 인과(因果)를 따지고 사물의 변화에 대한 추리를 요하는 모든 학문에서 필수적인 학문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존재와 시간과 공간의 상관관계에 대한 비밀을 풀 수 있는 학문은 역학(易學) 이상의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易學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또 공부에 뜻을 두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잘 알고 있는 바이지만 막상 역학 공부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책이 없다. 주역(周易)에 대한 해설서가 대부분이고 그외 상수역(象數易)이나 음양오행론 등, 개별 연구자 나름의 이해방식에 따라 쓰여진 책들이 있는 정도다. 마땅히 '역학총론'이라 이름할만한 책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역학이라 하면 난해하고 난삽한 것이라는 생각이 앞서고 지레 공부를 접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점에서 최근 출간된 <역학총론(易學總論)>(도서출판 방하)이 주목된다. 본서는, 易學의 중심과제를 체계적으로 갈래지우고 문제의 핵심으로 바로 직입하면서 역학공부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역학의 문제의식을 바로잡고 공부의 시야를 틔워줄 수 있는 측면에서도 이만한 책은 없었던 것 같다. 필자는 <역학총론>이 역학교제의 새로운 기원을 여는 책이라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배영순(영남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