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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勝之地

라이프(life)/풍수지리

by 굴재사람 2009. 11. 13.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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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살롱] 十勝之地

 

[1]

시국(時局)이 어수선하면 ‘정감록(鄭鑑錄)’을 펼쳐 보는 습관이 있다. ‘정감록’의 하이라이트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이다. 난리가 났을 때 이곳으로 피란을 가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다는 10군데의 장소이다. 하나같이 깊은 산골의 오지(奧地)에 해당한다.

 

십승지의 첫 번째로 꼽히던 곳은 경북 풍기(豊基)의 차암(車巖) 금계촌(金鷄村)이다. 금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金鷄抱卵)’의 명당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풍기는 산골 오지이면서도 명당에 해당하고, 들판이 있어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곳이다. 현재는 동양대학교가 이 근방에 자리 잡고 있다.


두 번째는 화산(花山)의 소령고기(召嶺古基)라고 되어 있는데, 안동의 춘양면(春陽面)을 가리킨다. 셋째는 보은의 속리산 아래 증항(蒸項) 근처이다. 넷째는 예천(醴泉)의 금당동(金堂洞) 북쪽이다. 이 땅은 비록 얕게 드러났으나 병란(兵亂)이 미치지 않아 여러 대에 걸쳐 편안하다고 되어 있다. 다섯째는 남원 운봉(雲峰)의 동점촌(銅店村) 주변 100리이다. 운봉은 지리산 자락의 해발 400~500m 높이에 자리 잡은 산골 분지이다. 여름에 운봉에서 보름 정도 지내본 적이 있는데, 삼복더위에도 선선한 곳이다.


여섯째는 공주의 유구(維鳩), 마곡(麻谷)의 두 물줄기 사이이다. 일곱째는 강원도 영월(寧越)의 정동쪽 상류이다. 수염 없는 자가 먼저 들어가면 안 된다고 적혀 있다. 여덟째는 무주(茂朱)의 무풍(茂豊) 북쪽 골짜기이다. 덕유산(德裕山)은 어디든지 난리를 피할 수 있는 ‘덕산’이라고 전해진다. 아홉째는 전북 부안(扶安)의 호암(壺巖) 아래와 변산(邊山) 동쪽이다. 열 번째는 가야산(伽倻山) 남쪽의 만수동(萬壽洞)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이북 지역은 ‘십승지(十勝地)’ 내에 한 군데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임진(臨津) 이북은 다시 오랑캐의 땅이 될 터이니 몸을 보전하는 것을 논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왜 십승지에 이북 지역은 한 군데도 포함되지 않았을까? 나는 ‘정감록’을 읽을 때마다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긴다. ‘정감록’을 만들었던 조선시대의 비결파(秘訣派)들도 이북 지역을 위험하게 보았다는 말인가?

 

[2]

“임진(臨津) 이북의 땅은 다시 오랑캐의 땅이 될 터이니 몸을 보전하는 것을 논할 수 없다”는 ‘정감록’의 예언은 문제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북 땅은 불안하다는 말 아닌가! 이 대목은 이북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것이다. 특히 풍수도참(風水圖讖)을 철석같이 믿었던 이북 비결파(秘訣派)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원래 풍수도참은 이남보다도 이북 사람들이 더 좋아하였다. 조선시대 내내 중앙권력으로부터 차별을 당했던 이북 지역은 중앙정부에 대한 ‘안티(anti)’의 성격이 진하게 담겨있는 ‘정감록’과 ‘풍수도참’의 내용이 입맛에 맞을 수밖에 없었다. 정감록의 이 예언을 믿고 대략 1890년대 후반부터 이남으로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그 1번지는 ‘십승지’의 제일 첫 번째 승지(勝地)인 경북 풍기(豊基)였다. 당시 평안북도의 박천, 영변 지역에서는 “풍기로 가야 산다”는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금을 캐기 위해 서부로 간 것이 아니라 난리에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남쪽으로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내려 왔다.


그 1진이 1890년대에 왔다면 2진은 1920년대에 왔다. 2진은 개성·평양에서 약 100여 가구가 풍기로 집단 이주를 하였다. 3진은 1945~50년 사이에 이북 전역에서 약 600가구가 ‘풍기로 가야 산다’는 말을 믿고 이주를 하였다. 1가구에 5명만 따져도 600가구이면 3000명에 해당한다. 대략 4000~5000명의 이북 사람들이 오직 정감록의 예언을 믿고 이북에 있던 전답을 팔아서 풍기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현재는 이들 후손들이 1000가구 정도 남아 있다. ‘풍기발전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인순(59)씨의 경우에는 박천에서 살다가 6촌 이내 일가족 40명이 아버지를 따라 모두 내려왔다고 한다. 1942년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교통의 오지였던 풍기에 오려면 걸어서 와야 했으나, 철도가 개통되면서부터 대규모의 이주가 가능했던 것이다.


6·25 이전에 비결을 믿고 월남한 이들은 객지인 풍기에 와서 먹고 살 수 있는 호구지책으로 ‘직물(織物)’과 ‘인삼(人蔘)’을 주로 하였다. 평안북도 사람들은 직물 쪽을 하였고, 개성 사람들은 인삼을 하였다. 정감록 믿고 망한 사람도 있지만, 풍기의 경우처럼 재미를 본 사람도 있다.

 

[3]

풍수도참(風水圖讖)을 믿고, 이북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온 장소를 대표적으로 꼽는다면 경북 풍기이다. 풍기 외에 강원도 횡성(橫城)도 있었다. 강원용 목사의 자서전인 ‘빈들에서’(1권)를 읽어 보면 횡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강 목사의 부친은 평소 풍수도참설을 신봉한 나머지, 해방 전에 고향인 함경도를 떠나 강원도 횡성으로 전 가족을 데리고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소식을 들은 강 목사가 횡성까지 찾아가서 부친을 설득하여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북 사람들만 풍수도참을 신봉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남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북과 이남이 공통적으로 선호했던 지역이 계룡산 ‘신도안’(新都內)이다. 계룡산 남동쪽 기슭에 해당하는 신도안은 이성계의 조선개국 당시부터 도읍지로 물망에 오르던 곳이었고, 지난번에 행정수도 이전이 논의되었을 때도 전국의 풍수지리가들은 대부분 신도안을 그 후보지로 꼽았다. 나라가 망한 일제시대에는 조선 비결파들이 총집결했던 곳이기도 하다. 새나라가 세워지면 바로 이곳에 도읍지가 들어서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북은 물론이고, 충청, 경상, 전라, 심지어는 제주도 사람들까지 신도안 근처로 이사를 왔다. 고향에 있는 논 팔고 집 팔아서 온 결단이었다. 어림잡아 2만~3만 명의 인구가 풍수도참을 믿고 계룡산으로 이주를 하였다고 본다.


김제 금산사(金山寺) 밑에 있는 마을인 원평(院坪)도 일제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세상이 개벽되면 이곳이 그 중심지가 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집 팔고 논 팔아서 이사를 왔다. 재미있는 점은 원평에 온 사람들의 상당수가 경상도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일제시대에는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로 이사를 많이 왔었다. 들판이 넓어서 경상도보다 먹고살기 좋다는 판단도 작용한 듯하다.


경상도 비결파들이 대거 이주해온 또 한군데의 승지(勝地)가 정읍 산외면(山外面)의 평사리(平沙里)이다. ‘평사낙안(平沙落雁)’의 대명당이 있다고 하여 태평양전쟁 무렵에 경상도 사람들이 몰려와서 살았다. 풍수도참이 성행한 시기는 시국이 어수선한 시기이다. 민초들이 살기 위해서 자구책으로 내놓은 안이 바로 풍수도참이었다.

 

(조용헌 · goat135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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