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속리산 복천암
[1]
산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천년고찰(千年古刹)에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한반도의 한가운데는 충북 지역이고, 충북에서도 속리산(俗離山)이다. 한국의 중심에 속리산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속리산에서 보은(報恩) 쪽으로 흘러간 물은 금강에 합류되고, 화북(化北) 쪽으로 흘러간 물은 낙동강으로 합류되며, 속리산 내(內)에서 흐르는 물은 괴산(槐山) 쪽으로 역류(逆流)하다가 한강에 합류된다.
속리산에서도 가장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는 고찰이 바로 복천암(福泉庵)이다. 그래서 복천암을 배꼽 ‘제(臍)’자를 써서 ‘속리산제중’(俗離山臍中)이라고 부른다. 속리산의 배꼽에 해당하는 복천암은 문장대의 맥이 천왕봉으로 가면서 갈라져 내려온 맥이 뭉친 지점이다.
복천암에서 풍수상으로 주목할 부분은 물이 나가는 수구(水口)가 벌어지지 않고 잘 막혀 있으며, 수구 밖에 있는 안산의 모습이 말안장처럼 생겼다는 점이다. 풍수가들은 앞에 보이는 안산이 말안장(馬峰)처럼 생긴 터에는 말을 탄 귀인이나 고관대작이 많이 배출되거나 또는 방문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복천암은 고려시대에는 공민왕이 자주 머물다 가곤 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머물다 갔다. 복천암에 전해져 오는 ‘복천보장(福泉寶藏)’이라는 문헌에 의하면 세조는 500명의 수행원들을 데리고 와서 3일간 머물다 갔다고 한다.
말티재 오기 전에 저수지가 있고, 이 저수지 옆을 보은 사람들은 ‘대궐 터’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세조가 데리고 온 500명의 수행원들이 여기에서 묵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정2품송’ 소나무도 세조가 법주사의 복천암을 찾아오던 길목에 서 있던 것이었다. 이 소나무 때문에 임금의 가마가 통과하기 어렵다고 걱정하였는데, 막상 임금 가마가 통과하려는 순간에 저절로 소나무 가지가 들어 올려져서 무사히 길을 지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나무에게 정2품의 벼슬을 주었던 것이다.
왜 세조가 한양을 떠나 고생을 하면서 깊은 산속인 속리산 복천암까지 찾아왔는가? 당시 대학자이자 고승(高僧)이었던 신미대사(信眉大師·1403~1480)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복천암에는 이 신미대사가 세종 대에 집현전 학사로 참여하여 한글을 만든 장본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2]
속리산 복천암에 전해져 오는 ‘신미대사(1403~1480) 한글 창제설’을 요약하면 이렇다. 신미(信眉)는 속성(俗姓)이 영산김씨(永山金氏)인데, 영산김씨 족보를 추적해보면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로 ‘득총어세종(得寵於世宗)’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집현전학사’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말이다. 이처럼 집안 내에서는 신미가 집현전학사였다고 내려오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집현전에서 일했다는 기록이 없다. 불교 승려는 무대 뒤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시대였던 것이다.
세종은 죽기 전에 유언으로 신미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者)’라는 법호를 내렸다. 하지만 유생들의 줄기찬 반대로 인해서 ‘우국이세’(나라를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라는 표현은 삭제되고, ‘혜각존자’라는 단어만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신미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범어(梵語)와 티베트어로 된 불교경전에 정통했던 대학자였으므로 혜각존자라 할 만하다. 이러한 인물이니까 세종 사후에도 세조(世祖)가 불교승려인 신미를 만나러 속리산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한글이 창제(1443)되고 나서 불과 몇 달 후에 집현전 실무 담당자인 부제학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 유학자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그 반대 배경에는 훈민정음의 원리적 근거가 유교가 아닌 불교였기 때문이고, 그 불교의 한가운데에 신미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공교롭게도 한글 창제 무렵에 간행된 국가적인 번역사업이 불교경전이라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24권 분량의 ‘석보상절(釋譜詳節)’이 그렇고,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도 그렇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도 찬불가(讚佛歌) 아닌가. 쉬운 한글을 만들었으면 ‘논어(論語)’‘맹자(孟子)’와 같은 유교경전들을 번역해서 백성들이 읽게 해야지, 왜 하필이면 불경을 번역했단 말인가.
‘월인석보’는 세종의 어지(御旨)가 108자이고, ‘훈민정음’은 28자와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찰에서 아침 저녁으로 종을 칠 때 그 횟수는 28번과 33번이다. 하늘의 28수(宿)와 불교의 우주관인 33천(天)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신미 창제설’의 결정적인 근거는 신미가 당대 최고의 범어전문가였고, 한글이 범어에서 유래하였다는 주장이다.
[3]
범어(梵語)는 고대 인도어다. 불교의 초기 경전은 범어로 적혀 있었고, 한자로 번역된 것이 대장경(大藏經)이다. 번역본을 읽다 보면 원전(原典)이 보고 싶어진다. 신미대사(信眉大師)는 불교 초기 경전의 원전을 보고 싶어서 범어를 공부하게 되었다.
신미는 한글을 만들 때 범어의 틀을 그대로 적용하였다고 한다. 범어에는 50개의 자모음(子母音)이 있는데, 신미는 이 가운데서 28개를 선별하였다. 한글에는 다섯 가지 발음체계가 있다. 어금니에서 발음이 되는 아음(牙音:ㄱ, ㅋ 등), 혓바닥에서 나는 설음(舌音:ㄷ, ㅌ), 입술에서 나는 순음(脣音:ㅂ, ㅍ), 이빨 사이에서 나는 치음(齒音:ㅈ, ㅊ), 목구멍에서 나는 후음(喉音:ㅎ, ㅇ)이다. 한글의 골격은 이 5단계 발음체계이다. 자음과 모음은 음(陰)과 양(陽), 그리고 이 5단계 발음체계는 오행(五行)에 배당시켰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체계는 범어에 그대로 있다는 것이 한글과 범어의 상관 관계를 30년 동안 추적해온 강상원(68) 박사의 주장이다(‘훈민정음 28자 어원적인 신해설’). 강 박사에 의하면 범어와 한글은 표현하는 문자만 서로 다를 뿐, 발음은 대부분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윷놀이할 때 ‘윷’이라는 말은 범어의 ‘yudh’에서 왔다. 범어로 ‘yudh’은 ‘별들의 전쟁’이라는 뜻이다. 정초에 하는 윷놀이는 하늘의 북극성을 중심으로 28수(宿)를 도는 과정이다. 28수를 한 바퀴 돌면 1년이 지난다. 윷놀이는 28개 별을 정초에 미리 짚어 보는 놀이이므로 별들의 전쟁이기도 하다. 아리랑은 범어의 ‘ari’와 ‘langh’이 합해졌다. ‘ari’는 ‘사랑하는 임’이라는 뜻이고, ‘langh’은 ‘서둘러 떠나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리랑은 “사랑하는 임이 서둘러 떠나다”라는 의미가 도출된다.
‘머슴(심)’의 ‘머(ma)’는 ‘관리하다’이고, 심(sime)은 ‘힘’이다. 따라서 머슴은 힘(노동력)을 관리하는 사람이 된다. ‘아사달’은 ‘난공불락의 성’이라는 뜻이다. ‘밥’은 범어의 ‘vame’에서 왔는데, 이는 ‘어머니의 젖’을 가리킨다. 밥 먹었느냐는 ‘젖 먹었느냐’의 뜻이었던 것이다. 쌀농사를 짓게 되면서 어머니의 젖이 쌀로 대체된 셈이다. 앞으로 논쟁해 볼 가치가 있는 흥미로운 주장이다.
(조용헌·goat135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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