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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라는 것, 그리고 운명이라는 것

라이프(life)/명리학

by 굴재사람 2009. 3. 21.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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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에서는 사주를 가지고 그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될는지를 읽어내게 되는데, 흔히들 사주가 좋다 또는 그렇지 않다, 얘기를 하다 보니 다양한 오해가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주만 좋으면, 그리고 운만 좋으면 성공하고 출세하느냐 하는 얘기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이 세상에 노력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가령 복권에 당첨된다든지, 유산을 물려받는다든지 하는 일이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일인데, 이는 예외적인 현상이지만, 이 또한 사주에 나타나 있으며, 그것을 일러 복(福)이라 한다. 이처럼 복을 바라는 마음은 인지상정이지만, 공짜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해서 실은 대단히 경계해야 하는 마음 자세다. 원하는 것을 달성하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사주를 본다는 것을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면, 어떤 사람의 기운이 충실한지, 의지와 노력하는 마음 자세가 실한지, 금전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나 관리 능력이 있는지,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제력이 있는지, 사람들이나 세상으로부터 배우고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사주팔자란 개인이 어떠한 운명의 경향을 타고 태어났는지를 말해주는 코드(code)일 뿐이지, 그 코드가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미술 방면에서 큰 성취를 이룬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 사람은 재능은 집안 내력에서 찾아볼 수도 있고, 자라는 과정에서 그런 소양이 환경 변수에 의해 촉발되기도 한다.
  
즉 핵심은 그 사람의 선천적인 재능과 의지력, 그리고 환경인 것이고, 사주는 그런 사실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주가 좋아서 미술에 대한 재능과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런 재능과 의지, 환경을 타고났다는 것을 사주가 알려줄 뿐이다. 대단히 간단하고도 자명한 사실이지만, 의외로 이 점을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흔하다는 것이 의아할 뿐이다.
  
그러니 사주만 좋다고 해서, 운만 좋다고 해서 성취되느냐 하는 그런 어리석은 질문은 앞으로 하지 않길 바란다.
  
따라서 어떤 미술학도가 찾아와서 자신의 생년월일시를 말하고 본인이 앞으로 미술을 하면 유망하겠냐고 물어본다면 그 사람의 사주를 보아 이런 판단을 내리게 될 경우,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는 것이다.
  
‘음, 이 학생은 미술에 재능이 있구먼, 그리고 하고픈 일은 하는 사람이네, 잘 하면 이 분야에서 성공하겠는데! 집념도 있어 보이고, 집안 환경도 제법 받쳐주겠는걸. 그리고 운을 보니 30대에 가면 더욱 왕성한 활동운이 와서 미술에 대한 성취가 클 거야. 그리고 이 일을 해서 돈도 제법 벌 것이고, 40대에 가면 명성도 얻겠는데, 그래 이 사람은 미술을 업으로 해도 되겠어.’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취하는 사람의 사주를 보면 재능과 노력, 환경이 모두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지, 재능이 없거나 노력이 없거나 또 여건이 너무 어렵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의 세 가지 조건 중에서 한 가지만 결여된 사람이라면, 사주를 보아 결여된 한가지가 인생 항로에서 만나게 되는가를 따져보는 것이고, 그 결과 그런 운이 온다면 희망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 운이 오지 않는다면 좀 어렵다고 말해준다.
  

그러면 이제 운명(運命)이란 것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가 되었다.
  
사실 운명이란 말은 서양의 이에 대응하는 말과는 뜻이 많이 다르다. 영어에서 운명에 가장 가까운 뜻을 지닌 어휘는 ‘destiny'이다. 그런데 이 어휘는 신의 뜻이라는 의미가 강하며, 그런 면에서 숙명이란 뜻에 더 가깝다. 그래서 운명에 항거한다든지 운명을 거스른다는 말을 쓰는데, 이 말은 절대자 또는 불변의 예정된 사실에 항거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 의지의 자유를 추구해왔던 서구 사상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표현이다. 운명이란 말은 그런 점에서 destiny 란 말과는 의의가 다르다.
  
운명이란 말의 원 뜻은 이렇다. 운이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외래의 환경을 말하는 것이고, 명이란 그 사람의 고유한 성향이나 주어진 것(the given)을 말한다. 운은 운동이란 말처럼 변동하는 것, 유동적인 환경인 것이고, 명이란 命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너는 이렇게 생겨났다는 얘기로서, 변화하지 않는 부동의 것을 말한다.
  
따라서 동아시아 세계에서 쓰는 운명이란 말은 원래 주어진 것과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외래의 환경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신적인 의지는 전혀 없으니 숙명이란 개념도 없다. 다시 말해 독립 변수와 외래 변수를 함께 일컬어 운명이란 말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명이 먼저고 운이 다음이니 명운(命運)이란 말이 더 정확한 말이 된다. 흔히 ‘명운을 걸고’ 어떤 일을 한다는 말을 쓰는데, 이것이 말을 제대로 쓰는 것이라 하겠다.
  

명운의 뜻을 알았다면, 자신의 운명에 거스르거나 항거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약간 이해가 부족하다면, 좀 더 설명을 하겠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려면 재능과 노력, 여건의 3자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를 두고 우리에게는 천지인 삼재(三才)라는 표현을 쓴다. 개인의 명운으로 볼 때, 타고난 재능은 하늘(天)이요, 여건은 땅(地)이며, 노력은 사람(人)이 된다.
  
이 중에서 일반적으로 명운에 거역한다는 말을 쓰게 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여건이 미흡해도 재능과 노력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경우에 흔히 이런 말을 쓴다. 또 한가지 경우는 재능이 부족하고 여건이 미흡해도, 부단하게 노력하는 노력가의 경우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사실 명운에 거스르는 것이라 볼 순 없다.
  
남보다 잘 하진 못해도 부단하게 노력한다는 것은 적어도 그 사람이 그 일을 대단히 좋아하지 않으면 어렵다. 앞서 미술의 예를 들면, 그림을 잘 그리진 못하고 여건이 어려워서 다른 일을 하면서도, 그림 그리는 일 자체가 대단히 즐겁기 때문에 주변에서 만류해도 기어코 그림을 그리면서 마침내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는 경우다. 이 때, 그림 그리는 일이 싫으면 애시당초 포기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고 사실이다.
  
이처럼 사실 따져보면 명운, 또는 운명에 거스르는 자는 없다. 다만 재능과 노력-달리 표현하면 의지-만 있다면, 여건이 다소 미흡하다 해도 끝내 자신의 의지와 재능을 관철시키는 것은 바로 인간 승리이고 인간의 위대성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따라서 천지인 삼재를 보아, 두 가지가 결여되어 있다면 사실 그만 두는 것이 옳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재능과 노력, 환경이라는 삼재 중에서 가장 힘을 가진 것은 역시 노력이라 할 것이다. 가령, 바둑 잘 두는 천재는 한국기원에서 프로 단을 인허받을 정도면 사실 다 바둑에 관한 한 천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창호나 조훈현 정도의 성취를 이루려면 엄청난 노력 없이는 결코 불가능하다. ‘천재는 1%의 재능과 99%의 노력’이라는 에디슨의 말이 그래서 좀 과장은 있을지언정,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과장된 면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끊임없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자는 사실 그 방면에 대단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어렵기 때문이다. 미치도록 좋아해야만 미치도록 노력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재능 30%, 노력 70% 정도가 가장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내는 것 같다.
  
  

이제 정리하자면, 운명에 거스르는 자, 일찍이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필자가 운명을 보는 사람이라고 하니 가끔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이 있기에 소개한다. 사주가 운명을 들여다보는 것이라면, 인간의 자유 의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까? 하는 말이다. 이 질문은 우리가 얼마나 서구 문화의 영향 속에서 살고 있는가를 필자로 하여금 통감하게 만드는 얘기이기도 하다.
  
인간의 자유 의지란 개념은 이미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인데, 그런 면에서 이는 서구적인 개념이다. 신이 명령한 것, 신이 이미 정한 것을 거역해서 하면 안 된다는 숙명론과의 치열한 투쟁이 바로 중세로부터 현대에까지 이어져온 서구인들의 문명사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서구인들은 그 자유를 획득한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존재하는 동아시아 세계에서의 숙명이란 개념은 봉건 계급 사회가 초래한 것이지, 정신면에서 고급의 사조가 아니었다. 장자가 숙명을 얘기했던가, 공자가 숙명을 논한 적이 있던가? 사실 없었다. 나중에 봉건 전제 사회가 되면서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후에야 만들어진 개념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사실 그 답변은 앞에서 사주를 본다는 것은 천지인 삼재를 보는 것이라는 말 속에서 이미 드린 셈이지만, 다시 하기로 한다. 어떤 사람이 의지력과 노력하는 힘을 가졌다면, 자신의 뜻대로 행하면 그만인 것이다. 거기에 재능도 어느 정도 있고, 어느 시점에 가서 여건마저 뒷받침된다면 세상에 이루지 못 할 일이 어디에 있는가?
  
감히 누가 당신의 의지와 뜻을 막는가? 여건이 어려워서 그만 둔다면 당신이 알아서 그만 둔 것이지, 누가 그만 두라고 했단 말인가? 또 물론 그만 둔다고 해서 그 선택을 잘못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선택이고 자유의지이다. 다만 재능만 있을 뿐, 의지가 부족해서 그만 포기한다면, 인간의 자유 의지 운운 할 자격마저 없는 것이다.
  
  

필자가 운명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간단하다. 일이란 것은 그 일이 좋기만 하다면, 하고 하고 또 해서(行行又行) 될 때까지 하면 마침내 되는 것이요, 설사 그 결과 이루지 못한다 해도 그만큼 즐겼으면 그것으로 이미 보상은 받은 것이라는 얘기다.
  
어느 누구도 당신의 자유 의지를 가로막지 않는다. 그저 이루어짐과 이루어지지 않음(成否)만 있을 뿐인데, 이 성부는 우리에게 체념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달관(達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정말 하고싶은 일은 성패(成敗)를 묻지 말고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는 행운도 따른다. 왜냐? 하늘마저 감동하니까(사실은 성부를 따지지 않고 하는 사람은 이미 성공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이다).

 

/김태규 명리학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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