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란 무엇인가?
절로 그러한 것이 바로 자연이다.
자연은 아름답기도 하고 냉혹하기도 하다. 하지만 자연에게는 아름답고자 하는 뜻도 냉혹하고자 하는 뜻도 없다. 우리 인간이 자연을 아름답게 혹은 냉혹하게 느끼는 것이지 자연은 그냥 그렇게 생겨먹었을 뿐이다.
절로 그러하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아무렇게나 생겨먹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절로 그러함을 유지하기 위한 참으로 정연한 질서를 그 속에 지니고 있다. 이를 일러서 자연의 법칙(法則)이라 한다.
숲에서 소나무를 만났다고 하자. 소나무는 햇빛을 받아 영양분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스스로의 키를 키워간다. 키를 키우지 않으면 다른 소나무나 다른 나무에게 빛을 앗기게 되고 결과 말라 죽어버린다.
그렇기에 소나무는 빛이 충분치 못한 아래쪽의 가지는 스스로 끊어버린다. 숲길을 걷다보면 밟게 되는 마른 소나무 가지들이 바로 그것이다. 스스로 잘라버린 것이다. 그래서 소나무는 머리 부분에만 가지와 잎이 무성하다.
우리가 지치거나 생각이 많을 때 잠시 바라보면서 여유를 얻고자 하는 소나무도 알고 보면 이처럼 자신의 일부를 자를 정도로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 세계 내지는 동물의 세계가 식물의 세계보다 더 각박하고 치열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식물을 모르기에 그런 것이지 식물의 세계 역시 결코 목가(牧歌)적인 여유가 없다.
정선 소금강을 지나다보면 저 높은 바위 봉우리 그 아슬아슬한 돌 틈새로 뿌리를 내린 소나무의 억척스런 생명력을 보라. 조상 대대로 모진 자연 속에서 단련되지 않았다면 그런 곳에라도 생명의 뿌리를 내릴 힘이 결코 없었을 것이다. 억척스런 생명력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동물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
다른 동물을 먹이로 살아가는 포식자들의 삶도 대단히 힘겹다. 먹이사슬의 정상에 자리를 잡았다고 좋아할 것이 전혀 없다. 자연은 포식자에게 풍부한 먹잇감을 제공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늑대와 사자. 표범과 같은 포식자들은 며칠간 굶고 지내는 것이 일상의 생활이다.
자연 속의 모든 동물과 식물들은 살아있다는 것 자체, 나아가서 번식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서 대성공인 것이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는 말이 있다. 약자는 먹히고 강자만 배불리 먹는 세계란 뜻이지만 실은 교묘한 거짓말이다. 실상은 약한 놈도 강한 놈도 항상 굶주림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세계가 자연인 것이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우승열패와 같은 말들은 결국 19세기 기술의 진보에 도취된 유럽 열강들이 다른 세계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념이었던 것이다.
먹이가 되는 약자가 사라지면 힘센 포식자도 사라지는 것이 진정한 자연의 법칙이다. 먹고 먹히는 사슬은 존재하지만 절대 강자도 절대 약자도 존재하지 않는 자연의 세계인 것이다.
소나무가 빛을 받기 위해 몸부림치며 자라면서 아래쪽 가지를 끊어버리는 행위, 동물들 간에 먹고 먹히는 행위, 냉혹한 자연의 현실을 보여준다.
숲에 가보면 동물의 먹고 먹히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나무와 풀들 사이에 온통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몸부림치는 아수라장이다.
하지만 그런 질서가 자리하고 있는 자연의 모습은 한편으로 아름답기도 하다.
우리가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든 냉혹함을 보든 모두 다 옳다.
하지만 자연은 절로 그러한 세계일 뿐, 스스로는 아름답고자 하는 의지나 냉혹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저 그렇게 맞물려 돌아가는 그대로의 세계인 것이다.
여기서 한 발 나아가서 자연은 우리 인간과 서로 바라보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연의 정복자가 아니라 우리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말이다.
좀 더 지능적인 동물이기에 일반의 자연과 약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역시 정도 나름일 뿐이다. 오히려 지능으로 해서 다른 일반의 자연보다 더 추악한 면도 많다.
자연의 법칙 아래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태양의 빛 에너지와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에 의탁하여 존재한다. 빛은 양(陽)이고 물은 음(陰)이다.
물은 그 자체로서 에너지를 지니지 않았지만 에너지를 전달하는 가장 뛰어난 매질(媒質)이기에 없어선 안 될 물질인 것이다.
물이 어째서 좋은 매질인지 궁금하면 우리 몸 속의 영양분을 전달하는 혈액을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혈액 역시 물에 바탕하고 있지 않은가.
지상에 내려온 빛 에너지를 필요한 곳으로 재분배하는 매체로서 물인 것이다.
자연 속의 모든 생명체들은 식물이든 동물이든 한 해에 걸친 태양 에너지의 소장(消長), 즉 줄어들고 늘어나는 것의 주기(週期)에 정교하게 맞추어서 살아간다.
한해살이가 아니라 다년생 식물, 그리고 수 십 년을 살아가는 동물이나 인간이라고 해서 그 주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실은 한 해의 순환에 따른 생리가 일생을 통해 큰 시간 속에서 동형반복과 확대 재생산이라는 프랙탈(fractal)의 원리를 통해 맞추어져 있다.
볍씨가 한 해의 주기에 맞추어 봄날 땅에 심어져서 싹을 틔우고 자라서 가을에 알곡을 맺고 일생을 마치듯이, 수 십 년을 사는 우리의 일생도 보다 긴 시간의 주기 속에서 동일한 과정을 밟으며 살고 죽어간다. 프랙탈인 것이다.
햇빛이 늘고 다시 줄어드는 과정을 말하는 계절의 변화와 주기는 모든 생명체 속에서 작은 시간 단위에서 긴 시간 단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동일한 어떤 과정을 만들어내고 확대 재생산한다.
그런 과정, 근원적으로 햇빛의 소장(消長)에서 생기는 자연의 법칙을 세분하면 시작하고 늘어나고 정점에 이르러 다시 줄어들고 아주 약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를 놓고 동아시아 사람들은 목화토금수의 오행(五行)이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지금 필자는 명리학의 이치를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 모든 생명이 태양 빛과 물에 의해 설계된 세상의 이치를 생명 속에 담고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자연과 생명의 신비라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논밭을 일구는 농부는 세월의 반복된 동작을 통해 스스로가 논이고 밭임을 알게 된다. 농부의 처음 의도는 곡물을 키워 그로써 먹고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함이겠지만 결국 자신이 바로 논이고 밭임을 알게 됨으로써 자연과 생명의 신비를 체득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런 깨침은 반드시 농부나 장인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현대적인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든 어떤 일을 하든 마찬가지이다.
칼을 만드는 장인에게 있어 칼이 바로 자신이듯이,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는 이 역시 처음에는 돈이 필요해서 시작했는지 몰라도 세월의 흐름과 반복 속에서 노동은 그냥 노동이 아니라 생명의 약동이고 향유이며, 자신의 일과 봉사 대상인 타인들이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길로 들어섰든 세월의 흐름과 반복 속에서 정성을 다하다 보면 일과 자신이 하나이고, 대상과 자신이 하나이며 결국 자연과 내가 하나임을 진실로 인지하는 순간이 절로 오는 것이니 이것을 두고 도(道)에 들었다 하는 것이다.
대도(大道)는 그래서 별도의 문(門)이 없으니 일러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한다.
/김태규 명리학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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