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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와 삶, 그리고 생업(生業)에 대해

라이프(life)/명리학

by 굴재사람 2009. 3. 20.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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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다니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인생의 진실(眞實)된 이치를 깨닫고자 산으로 들어가는 이도 있다. 이런 일의 역사도 참으로 오래 되었으니, 싯다르타가 그렇고 예수님도 그 길을 가셨던 분이다.

또 어떤 이는 더 큰 성공을 위해 직장을 떠나 사업을 시작하기도 한다.

전자(前者)를 거룩하다고 하고 후자(後者)를 속물적이라 여긴다면 그것은 아직 그대가 삶의 진실을 모르고 있음이다.

전자가 참된 이치에 대한 앎을 통해 삶의 충족을 추구하고, 후자는 세속적인 성공을 통해 삶의 충족을 추구하니 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정신이 물질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 삶의 이치를 아는 것이 세속적인 성공보다 더 거룩한 것이라는 생각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라, 세속적인 성공 속에 정신의 만족(滿足)은 없는 것인지. 당연히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정신적인 만족을 떠나 실은 무슨 만족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세속의 성공을 통한 정신적인 만족을 인정한다고 해도 참된 이치를 통한 만족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가?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위라는 생각은 거꾸로 물질에 대한 추구가 인간의 더 보편적인 욕구임을 반증(反證)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그렇다고 물질이 정신보다 우위에 있다고 강변(强辯)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구분이 그다지 절대적이지 않음을 얘기하기 위함이다.

잘 먹고 잘 살다 가는 것이 좋은 삶이고 충족된 삶이다.

그런데 잘 먹는다는 것이 반드시 값비싼 음식을 늘 포만하게 먹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잘 살다 간다는 것이 부귀와 권세를 뽐내며 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듯이 여러 요소들을 고루 갖춘 삶이 잘 먹고 잘 살다 가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 여러 요소들을 구태여 구분하자면 정신적인 것도 있고 물질적도 것도 있다는 것이지 사실 구분지우지 않아도 별 관계가 없는 것이다.

또 그 여러 요소들의 어떠한 조합(組合)을 원하는지를 일러서 우리는 가치관(價値觀)이라고 말한다.

그 조합 속에 정신적인 요소가 더 많으면 고상(高尙)하고 물질적인 요소가 많으면 저속(低俗)으로 단정 짓는 것은 억지이다.

극단적인 얘기이지만, 가령 그대가 아이스크림을 매일 먹을 수만 있다면 달콤한 인생이라 여기고 소주 한 병만 매일 먹을 수만 있다면 한 세상 얼큰하게 보내는 데 무리가 없다 여긴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다.

이제 정리해보자.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남들이 거룩하다고 여기는 것에 얽매일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보아 만족스럽고 충족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좋은 삶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에 따라 그대가 지닌 가치관이 있을 것이고 그 가치관 또한 세월의 경험 속에서 다소간에 변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 필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사람마다 갈 길은 다를 수 있고 또 다른 것이 오히려 정상이라는 점이다.

이를 두고 필자는 '인유각도(人有各道)', 사람마다 각자의 길이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또 한 가지는 각자가 다른 길을 가는 것처럼 일견 보이겠지만 그 길은 궁극에 있어 실은 '하나의 도(道)'라는 것이다.

이를 책에서는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 한다. 수없이 많은 물결과 흐름이 결국 바다에 가서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유각도'와 '만류귀종'이 결국은 하나인 셈이고, 그 전체를 아울러서 그저 '도(道)'라 하는 것이다.

속세를 벗어나 산중에서 또 광야에서 진실 게임을 하든, 직장에서 스스로를 근신해가면서 출세를 하든, 더 큰 성공을 위해 사업을 하든, 학문을 통해 이치를 탐구하든 실은 상관없다.

노골적으로 얘기해서, 남들로부터 주목받고 싶다거나 엄청난 재부(財富)를 모아야만 행복할 것 같다면 기꺼이 그 길로 나서라는 것이다. 다만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보아 그 길이 내게는 좋고 옳은 길일 때의 이야기다.

어떤 길을 택했든 자신을 속이지 않고 진지하게 길을 가면 그 길은 당신의 삶을 긍정하게 되는 깨달음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그래 그런대로 좋았어, 다시 살 수 있다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있겠지만 이대로도 좋아'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이다.

길에서 만난 여러 시련, 비바람을 만나고 더러는 낭떠러지나 막다른 길로 내몰렸던 순간들, 또 기대하지 않았던 따뜻한 마음과 도움의 손길들이 당신 속에서 용해되고 스며들어 당신의 삶을 완성시켜 주기 때문이다.

혹여 그대가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해도 너무 당혹해 하지 말라. 길을 가는 도중에 있기 마련인 잠시의 시련일 수도 있으니.

우리 삶의 대부분의 시간들은 자만과 헛된 욕망에 이끌려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으로 메워지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 부끄러워하고 슬퍼하거나 탄식할 일도 아니다.

그 또한 스스로를 속일 필요가 없이 당당한 나의 발걸음으로 가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열정은 사실 대부분 헛짓거리로 이어지지만 헛짓거리를 하지 않고 어떻게 진실을 가려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겠는가?

또 한 가지 길을 가는 당신에게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는 어찌 되었든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을 벗어날 순 없기에 생업(生業)의 무게를 애써 외면함도 또한 헛된 짓거리이다.

젊은이에게 맞는 직장은 세상에 흔하지 않다. 혼자 일하면 수입이 적고, 좀 보수가 있는 직장은 타협과 구속이 있기에 그 또한 젊은이에게 맞지 않는다.


그러면 이제부터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하는 방법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낚시를 무진장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당장 눈앞의 현실로 인해 다른 직장이나 생업을 택했다고 하자. '다음에 돈을 많이 벌어서 낚시 열나게 하면서 살아야지"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결혼하고 자녀가 생기고 남들처럼 갖출 것 갖추면서 살다보니 돈은 모이질 않고 낚시할 짬도 별로 없다. 그러다가 은퇴해서 낚시를 즐기려하니 그 또한 그저 그렇다.

그렇기에 낚시를 진실로 좋아한다면 낚시와 관련된 일을 하라는 것이다. 낚시와 관련된 잡지사나 방송에서 기자를 하거나 바로 바다나 호수 근처의 낚시터에서 가게를 하면 될 일이다. 그러면 낚시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성공의 지름길은 정말로 하고픈 일을 바로 시작하라는 것이고, 가다보면 온갖 고난과 시련을 만나겠지만 워낙 좋아한 까닭에 견뎌낼 수 있다. 그래서 한 30년 정도 지나다보면 당신 앞에 길 가는 이가 없을 것이니 당신이 바로 대가(大家)이고 마스터(master)인 것이다.

먹고 살면서 눈앞의 일만을 따랐으나 대가가 될 수 있는 길을 말했다.

하지만 정말 좋아하는 일이 있어도 형편상 부모와 형제를 돌보아야 하기에 그런 길을 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또한 세월을 살면서 때를 엿보다보면 마침내 가고픈 길을 갈 것이다.

진실(眞實)된 열정(熱情)은 산(山)도 옮기고 강(江)도 흐름을 바꾼다.

/김태규 명리학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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