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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와 운명, 그리고 주체적 삶에 대해

라이프(life)/명리학

by 굴재사람 2009. 3. 2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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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하다 보면 더러 ‘아, 이 분은 운명 상담보다는 심리치료가 더 필요하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자주 있다.

하지만 자신의 미래를 놓고 마치 로또 복권을 한 장 사서 결과를 보듯이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으레 운명학이라면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미리 말해주는 기술로 알려져 왔던 탓이다.

운명학의 본래 의도는 그런 것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재능과 자질을 가졌는지, 특장점은 무엇이고 무엇이 잘 안 되는 사람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장래 만나게 되는 환경의 변화, 일러서 운(運)이라는 것을 알아서 무엇을 더 배우고 발전시킬 것인지, 어떤 요소가 삶에 있어 장애가 될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보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다음과 같은 식으로 자신의 운명을 물어보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저는 잘 살게 될까요? 저에게 재운은 좀 있나요? 이 사람하고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별 탈 없이 잘 살 수 있을까요? 이번에 이런 사업을 시작했는데, 잘 될까요?

사람은 누구나 미래가 궁금하고 또 걱정하면서 살아간다. 이른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하지만 미래를 지나치게 궁금해 하거나 염려하는 것은 현재의 삶을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릴 위험성이 있다.

가령, 현재의 삶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거나 그저 지나가야 할 시간들로만 여긴다면 현재의 삶을 즐기거나 만족할 순 없는 것이다.

물론 큰 인물 중에는 자신에 대한 엄격한 관리를 일생 풀지 않고 마침내 대업을 이룬 사람도 있다. 일본 전국 말기의 무장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모친의 말을 일생 좌우명으로 삼았었다.

하지만 이처럼 큰 인물의 삶은 오히려 예외적인 것이며,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큰 그릇이든 작은 그릇이든 그에 상관없이 저마다의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미래가 궁금해서 그리고 불안해서 운명을 물어본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태도가 아니다. 현재를 성실히 사는 가운데 미래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리 치료 중에 게슈탈트 치료라는 것이 있다. 20세기 초, 독일에서 개발되어 지난 1970년대에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었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여기서 ‘게슈탈트’라는 독일어 어휘에 대한 설명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형태’라는 뜻이라고만 알아두자.

다만 재미난 점은 이 치료 기법이 선(禪)이나 명상과도 유사한 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해두고자 한다. 그 바람에 서구에서는 상당한 대중적 인기를 모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주체적 삶을 살기보다는 역할 연기(role playing)에 더 충실한 경향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가령, 남자는 결혼해서 가장이 되면 스스로의 고유한 충동이나 욕구보다는 가족의 부양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남편의 역할과 아버지의 역할이 더 중요시된다. 여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가 아니라 한 남자의 아내로서의 역할, 자녀의 어머니로서의 역할, 시댁 내에서 며느리로서의 역할이 자신 고유의 삶보다 더 엄중하게만 다가온다.

그런데 게슈탈트 치료는 그런 역할 연기가 당신의 인생을 좀 먹고 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을 심리장애 또는 정신장애로 몰고 간다, 역할 연기가 당신이 바라는 삶의 모습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스스로의 삶을 살라고 강조한다. 간단히 말해서 당신은 한 유기체적 존재로서 남들이 기대하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게슈탈트 치료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치료 기법도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당신 눈앞의 삶에 충실해야 하며, 지금 이 순간에 만족스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즉자(卽自)적인 것을 강조한다는 것은 바로 선이나 명상의 사상과 깊은 연관성을 있음을 알 수 있다.

게슈탈트 심리학이나 그와 유사하면서도 또 다른 경향인 ‘자기심리학’등에 대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게슈탈트 심리학에서는 결국 불확실한 미래가 두렵기 때문에 미래를 거부하는 상태가 심리적 장애라고 말하고 있다.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대비하여 사람들은 여러 가지 준비와 안전장치를 마련하는데, 그 안전장치의 하나가 바로 역할 연기라고 말한다. 그 결과 삶 자체가 공허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사주나 운명과 관련하여 특별히 관심을 지니는 것은 미래란 것에 대한 게슈탈트 심리학의 접근 방법이다. 동 심리학은 예측 가능한 미래란 이미 미래가 아니라고 말한다. 미래란 그 본질에 있어 열려있는 것인데, 역할 연기적 행동은 미래를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바람에 미래의 본질을 왜곡시키게 된다는 것이 동 심리학의 사상이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두렵다는 것은 사실상 미래를 거부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필자를 찾아와 상담하시는 분들 중에는 이처럼 미래가 두려워서 안전을 확인하려는 동기를 가진 경우가 많다.

앞서 예를 든 것처럼, 잘 살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너무 막연한 것이며, 재운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 역시 한편으로 별로 좋은 질문이 아니다. 이미 본인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돈을 모으겠다는 스스로의 강한 의지만 있다면 재산을 일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사람과 잘 살 수 있느냐 하는 문제 역시 그렇다. 이미 결심을 했다면, 여기 저기 운명을 본다는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볼 사안은 아닌 것이다. 그보다는 어떻게 해야 좋은 가정을 꾸릴 수 있을지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또 어떤 사업을 이미 시작해 놓고 나서 물어본다는 것은 심약한 마음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기왕지사 사업에 손을 대었다면 열심히 열과 성을 다해 잘 될 때까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얘기하지만, 운명학의 본질은 미래 예측보다는 그 사람의 타고난 기질이나 성향, 건강, 정서, 나아가서 그 사람만의 개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다. 이런 요소들을 운명학에서는 주어진 명(命)이라고 한다.

그런 연후에야 그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주변의 환경적인 요소들을 읽어내고자 한다. 여기서 외래의 변화하는 환경을 일러 운(運)이라 한다.

따라서 운명을 본다는 것은 그 사람에 고유한 기질과 성향을 읽어내고 그런 성향이나 기질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외부 환경과 어떤 상호 작용, 다시 말해서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이냐를 보는 것이다.

앞서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말하듯이 미래란 본질적으로 열려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미래가 확정되어 있지 않다는 말인데, 필자는 음양오행을 오랫동안 연구해오면서 늘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점이다. 미래가 고정(fix)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에 필자는 동감을 느낀다.

그러나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미래가 열려있다고 해서 모든 가능성이 다 열려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산비탈 암벽 사이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있다고 하자. 다른 소나무들은 넓고 평평한 대지위에 뿌리를 내린 덕분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간다. 하지만, 비탈 암벽 사이에 비스듬하게 서 있는 소나무는 그럴 수가 없다. 암벽 사이의 소나무가 평지위에 자라는 소나무와 같은 순탄한 삶을 영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운명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삶도 그 출발선에서부터 어떤 조건을 받은 상태에서 시작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가정환경만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물려받게 되는 유전적인 요소들은 그 사람의 삶을 사실상 절대적으로 지배하게 된다.

좋은 두뇌를 가진 부모를 두었다면 그 사람 역시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이며, 건강한 신체를 지닌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면 그 역시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복(福) 중에서 가장 중요한 복이 바로 부모복인 것이다. 줄여 말해서, 재벌가에 태어나면 그 사람 역시 재벌의 삶을 살 가능성이 그만큼 큰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명(命)인 것이며, 강한 의지력을 지녔느냐 하는 점 역시 알고 보면 이미 태어날 때 받은 명(命)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명이라고 해서 윤택한 삶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외부 환경적 요인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운(運)의 요소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아주 좋은 성격과 자질, 재능과 의지력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해도 외부의 환경 변수 자체를 전적으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뛰어난 자라 할지라도 남이 보기에 불우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이며, 다소 우둔한 자라도 환경에 따라서는 윤택한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앞길은 열려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미래란 게슈탈트 치료에서 말하듯이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세계도 아니요, 그렇다고 전적으로 확정(fix)되어 있지도 않다. 아마도 그 중간 어디쯤엔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김태규 명리학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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