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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 도(道), 도(道)

라이프(life)/명리학

by 굴재사람 2009. 3. 18.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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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란 그저 자연과 계절의 순환이고 그를 통해 인간이 느끼는 이치(理致)인데, 훗날 이 '도'란 말이 여러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은 유교(儒敎)에서도 '도'란 말을 썼기 때문이다.

특히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공자의 말씀이 그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그 또한 '도'란 말을 썼기에 더욱 혼란스러운 결과가 되었다.

그로 인해 유도(儒道)와 불도(佛道), 선도(仙道)로 해서 저마다 다른 내용의 '도'를 주창하게 된 것이다.

이는 '도'란 어휘가 상당히 설득력 있고 매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진리 또는 세상의 참된 이치와 동의어(同義語)로서 '도'가 자리 잡은 결과라고 하겠다.

유불선(儒佛仙)은 각자 다른 가르침을 전하고 있지만 모두 '크나큰 가르침'이기에 종교(宗敎)라 하는 것이다.

이어 기독교가 들어와 세상은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간단히 그 핵심 종지(宗旨)를 밝혀보자.

유교는 세상이 험할수록 더욱 어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왔다 가는 세상이니 집착에서 벗어나야만 편하게 산다는 것이다.
선교는 저절로 존재하고 영원히 순환하는 세상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주 예수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더 줄이면 유교는 인(仁)이고 불교는 무상(無常)이며 선교는 자연(自然)이고 기독교는 신(信)이라 하겠다.

이처럼 여러 '도'가 있지만, 필자가 말하는 것은 역시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가 말했던 것과 맥이 닿아있다.

그리고 노자(老子)가 말한 '도'의 참 모습, 즉 계절의 순환과 자연의 이치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이라고 하는 것 속에서 최고도로 잘 설명되고 있다.

자연과 계절의 순환 속에서 인간들이 통찰했던 것들, 자연 속에서 변하지 않는 그 무엇과 끊임없이 변해가는 그 무엇, 변불변(變不變)의 이치를 정연한 논리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음양오행인 것이다.

따라서 음양오행을 알게 됨으로써 '도'의 참 모습을 알게 되고 그를 통해 한 세상 잘 살아갈 수 있는 실용(實用)적 효용, 더하여 유한(有限)한 삶에 대해 안타까워할 것만 아니라 유한과 무한의 두 모습을 함께 받아들임으로써 마침내 그 두 경계를 초월(超越)하여 선인(仙人)의 경지로 들어설 수 있음이다.

태어났기에 우리는 잘 살아야 하고 잘 살고프다.

이 세상에 사는 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는가!

심지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할 정도로 산다는 것이 좋은 이유를 그대는 아시는가?

그 이유는 바로 우리의 삶에는 시간적 한계가 그어져 있기 때문이다.

야구는 '9회', 축구는 전후반 90분이라는 한계가 그어져 있기에 재미난 것이듯이, 삶이 그토록 신이 나고 재미날 수 있는 까닭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기에 그런 것이다.

그러니 유한한 삶의 시간들을 소중하고 알뜰하게 써야 한다. 반대로 시간을 잘 사용하지 않고 낭비한다면 천하 그 무엇을 얻는다 해도 모두 부질없음이다.

우리의 삶은 어릴 적에는 마치 시민권인 양 착각하다가 철이 들면 영주권으로 바뀌고 더 나이가 들면 체류비자로 그리고 늙은 나이가 나면 방문비자였음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때가 되면 마침내 삶으로부터 떠나라는 행정처분을 받는 것으로 끝이 난다.

'내일이면 해는 또 뜨겠지 뭐' 하는 마음이다가, 어느 순간 그대는 그 흔한 햇살을 쪼일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해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내일의 해도 그럴 것이니 그로서 아까운 삶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잘 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돈을 벌고 사랑한다. 또 재테크를 익혀서 재산도 불리고자 하고 출세를 통해 권세를 누리고자 한다. 그런가 하면 잘 살기 위해 경쟁하고 남의 뒷다리를 잡아채고 험담하고 비방하면서 끊임없이 앞을 다툰다.

다 좋다, 잘 살기 위함이니 사실 그다지 뭐라 할 일도 아니다. 잘 살아보겠다는데 거기에 '딴지'를 걸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매 순간 쉼 없이 흘러나가고 있는 삶의 시간을 소홀히 여긴다면 마땅히 '딴지'를 걸어야겠다.

그대가 이 세상을 떠나도 하늘과 땅은 존재할 것이고 시간도 한이 없다. 문자 그대로 천장지구(天長地久)인 것이다.

절로 존재하는 자연이고 영원히 순환하는 시간이지만 너무나도 흔해서 그 값마저도 없다. 하지만 그 속을 왔다가는 우리의 삶은 유한(有限)하기에 비싸도 한참 비싼 것이다.

천지와 자연은 절로 그러하니 값이 없고 우리의 삶은 너무 비싸서 값을 감히 매길 수 없으니 둘 다 무가지보(無價之寶)인 것이다.

좀 글에 멋을 부리면 유무상통(有無相通)이라 하겠다.

봄날 벚꽃 화창한 날, 그 사이로 걸어보라. 바람이 불지 않아도 분분히 져 내리는 꽃잎에서 무슨 무게가 느껴지는가. 그 어여쁘나 하등(何等)의 무게 없는 꽃잎에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가벼운지를 느낄 것이다.

지는 꽃잎에서 생명을 느끼고 그 가벼움을 느낀다는 것은 거꾸로 우리의 삶이 실로 소중하기 때문이다.

여름날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이 왜 우리를 흔들어놓는가. 지난 날 그토록 사랑했던 연인의 눈동자와도 같은 그 음영은 삶에 대한 우리의 열정이기 때문이다.

가을날 저녁, 빈 가지 사이에 걸린 소슬한 조각달이 왜 우리를 설레이게 하는가. 어느덧 지나가 버린 시간들에 대한 아련함이기 때문이다.

겨울날 이른 아침에 마시는 한 잔의 커피가 그토록 향기로운 것은 이제 우리가 먼 길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은 어쩌면 돌아올 수 없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런 말들을 늘어놓는 것은 공연히 그대를 '센티멘탈'로 몰아가기 위함이 아니라, 절로 존재하는 자연과 시간이 우리와 끊임없이 교감(交感)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천지와 자연과 교감하면서 산다는 것, 바로 그것이 잘 살 수 있는 삶의 출발점이다.

이 길로 들어선다는 것은 우리가 지닌 감수성(感受性)을 활짝 열어놓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오관(五官)은 천지자연과 오고 감, 즉 거래(去來)를 할 수 있는 문(門)이니 그 문을 활짝 열어젖혀야만 살아도 제대로 사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은 연하고 여린 것이며, 살아있어도 문을 열어놓지 않으면 굳고 딱딱할 것이니 삶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옛 사람들은 봄날 청명(淸明)의 때에 살랑대는 바람을 콧등으로 느꼈고, 가을 상강(霜降)의 찬 기운에서 사라져가는 생명의 안타까움을 향수(享受)했던 것이니 바로 풍류(風流)인 것이다.

풍류(風流)하는 마음, 그것은 세상에 처해 자유자재(自由自在)하는 정신이고, 명리(名利)를 쫓다가도 시운(時運)이 아니면 다 떨쳐내고 소요(逍遙)하는 달인(達人)의 경계로 들어설 수 있게 만드는 힘이다.

풍류의 몸과 마음으로 세상을 걸어가다 보면 절로 느끼고 절로 통찰하게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도(道)라 하겠다. 그리고 그 길에서 어느 순간 유한한 삶이 바로 무한(無限)한 것임을 알게 되는 때가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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