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산을 오르는 중입니다. 예전 같으면 산을 타는 중이라고 했겠지만 이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한 형님이 그러셨거든요. 산이 너보다 나이가 얼마나 많은데 감히 탄다는 말을 하느냐고. 할머니의 등에 올라타는 게 아니라 등에 업히는 것이듯 산도 그러는 거라고요.
그 말을 떠올리며 입구부터 한 걸음씩 내디뎌 봅니다. 새 마음으로 새해를 출발하고 싶은 사람이 많은지 이 차가운 아침에도 산을 찾은 사람은 꽤 많습니다. 부스럭부스럭 등산복 스치는 소리가 듣기에 좋습니다. 앞을 올려다보니 빨간색 등산복이 점점이 꾸물거리며 올라가는 모습도 보기 좋고요.
가끔 저를 알아보시는 분이 있어 악수를 청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한 번씩 속도를 늦추지만 그것 또한 나쁘지 않습니다. 급할 것은 더더욱 없지요. 산은 언제나 등을 내주며 그 자리에서 기다려 주니까요.
사람을 보고 나무를 보고 나무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걷습니다. 걷다 보면 수없이 많은 잡념이 떠올랐다가 또 한참을 걷다 보면 잡념이 없어지며 머리가 텅 비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올랐을까, 정상에 어느 정도 가까웠는지 늘 그렇듯 간간이 주저앉아 쉬는 사람이 보입니다. 물을 마시기도 하고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기도 하는 얼굴이 매우 지쳐 보이기보다는 한편 밝아 보여 다행스럽습니다.
한 번쯤 여유롭게 쉬어 가는 일은 원래는 참 좋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는 길 끝을 향해 달리기만 하느라 한 번 쉬어 가도 좋을 길을 죽을 듯이 달리지요. 끝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하느라 가는 길에 있는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할 때가 많고요.
정상 향한 달리기는 이제 그만
정상을 향해 허덕이느라 이 많은 나무와 신선한 공기를 외면한다면 등산이 트레드밀(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일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일에 매달리느라 정작 가족과는 멀어졌던 우리 아버지들처럼, 그런 슬픈 달리기를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산에서 내려오는 길. 모든 일이 그렇지만 등산에서도 빨리 오르기보다 넘어지지 않고 잘 내려오는 일이 더 중요함을 알기에 굳이 한 번 나무에 기대어 쉬어 줍니다. 잠시 내 몸을 기대게 해준 것이 고마워 비탈에 서 있는 나무를 슬그머니 안아도 봅니다. 아침 해의 기운이 묻어서인지 앙상해 보였던 나무에서 따뜻함이 전해져 오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나무를 참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무를 실제로 안아보는 일은 처음입니다. 살아 있는 나무가 따뜻할 수 있다는 사실. 내가 다가가 안아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거지요. 나무는 자기가 움직여 다가올 수 없으니까요.
산에서는 이렇게 작은 것으로부터 많은 생각이 떠오르곤 합니다.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 자리에, 그 비탈에 서 있을 나무와 헤어져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움직이지 못하는 모든 것에게 다가가는 용기를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무처럼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것, 몸이 불편해서, 수줍어서, 잘못한 것이 있어서 다가오지 못하는 사람에게. 몇몇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가끔 35년이나 잘 살아온 이 세상이 온통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나만 이상하게 살고 있는 것 같을 때가 있지요. 어느 시인은 사람 사이에 섬이 있고 그 섬에 가고 싶다고 했는데 바다보다 산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더 익숙한 저에겐 사람이 작은 점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서로 이어져 있지 않은 채 드문드문 세상에 박혀 있는 점 말입니다.
내가 어젯밤 어떤 시를 읽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술도 안 마셨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작년에 얼마를 벌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솔직하다고 하지요. 그저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이라고 하면 남자가 목표도 없는 삶을 사는 건 아니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은 몇 살까지 몇억 원을 버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당당히 밝히기도 하지요.
세상을 향해 손 내밀 용기 생겨
시보다 돈을 이야기하라고 강요하는, 꿈보다 욕심을, 하늘의 별보다 연예인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더 좋아하는 이 세상이 낯설게 느껴질 때면 저는 종종 산의 등에 업히러 갑니다. 산에 업히고 산에서 생각하고 산에서 내려오는 과정이 좋습니다. 누구에게 말하기에는 너무 사소하지만 많은 생각과 많은 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걷다 보면 다시 세상을 향해 친하게 손 내밀 용기가 생깁니다. 점처럼 서로 떨어져 사는 사람 사이를 선으로 잇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산꼭대기라는 점 하나를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오르고 내리는 선을 타고 걷다 보니 그런가 봅니다.
김제동 /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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