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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보은 속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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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굴재사람 2014. 12. 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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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 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으나

속세는 산을 떠나는구나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

 

- 최치원 -

 

 

 

 



충북 보은군과 경북 상주군 화북면에 걸쳐 있는 속리산은 우리나라 대찰 가운데 하나인 법주사를 품고 있다.
정상인
천황봉(1,058m), 비로봉(1,032m), 문장대(1,033m), 관음봉(982m), 입석대 등 아홉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능선이 장쾌하다. 봉우리가 아홉 개 있는 산이라고 해서 신라시대 이전에는 구봉산이라고도 불렀다.
속리산은 산세가 수려하여
한국 8경 중의 하나로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속리산은 법주사(사적 명승지4호), 문장대, 정2품 소나무(천연기념물 103호)로 대표된다. 법주사에는 팔상전, 쌍사자석등, 석연지의 국보와 사천왕석등, 대웅전, 원통보전, 마애여래의상, 신법천문도병풍의 보물등 문화재가 많다.

문장대는 해발 1,033m높이로 속리산의 한 봉우리이며, 문장대에 오르면 속리산의 절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문장대는 바위가 하늘 높이 치솟아 흰구름과 맞닿은 듯한 절경을 이루고 있어 일명 운장대라고도 한다. 문장대 안내판에는 문장대를 세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설을 전하고 있다.

 

정2품 소나무는 법주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수령 600여년의 소나무로, 조선 세조 때, 임금님으로부터 정이품이란 벼슬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이 소나무는 마치 우산을 펼친 듯한 우아한 자태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다.
세조대왕(1464년)이 법주사로 행차할 때 대왕이 탄 연이 이 소나무에 걸릴까 염려해 '연 걸린다'라고 소리치자 소나무가지가 번쩍 들려 무사히 통과했다는 사연으로 '연걸이 나무'라고도 한다. 이러한 연유로 대왕은 이 나무에 정2품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속리산은 백두대간의 허리이자 한남금북정맥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에 자리한다. 한반도를 인체에 비유하면 속리산은 척추의 허리뼈(요추) 지점에 있다. 속리산에서 비롯한 물은 금강·(남)한강·낙동강 세 줄기로 나뉘어 흘러 삼파수(三波水)라고 했다. 삼파수의 공간이미지를 크게 떠올려보시라. 삼태극 아이콘이다. 그래서 속리산은 겨레정신이 발원하는 공간적 원점 자리다. 삼파수는 옛 명칭이다. 조선중기 김극성의 문집에 “문장대 위의 삼파수”라는 글이 나오고, 조선후기의 <괴산군읍지>에도 “속리산 삼파수”가 등장한다. 삼파수는 황해도 구월산에도 있다고 김정호는 <대동지지>에 기록했다. 속리산의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신라 때부터 중사(中祀)로 나라의 제사를 받았다.

한국의 다른 명산들에 비해 속리산은 봉우리가 많고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전국의 산 국립공원 경관자원에 속리산은 총 35개 봉우리가 지정되어 가장 많은 숫자다. 설악산은 그 다음으로 29개, 지리산은 25개다. 속리산은 봉우리 아홉이 두드러져 구봉산이라는 이름도 가졌다. “석세(石勢)가 높고 크고 중첩하며, 산봉우리가 하늘로 치솟은 것이 마치 만개의 창을 벌여 놓은 것 같다.” 김정호의 찬탄이다. 이중환은 “바위의 형세가 높고 크며 봉우리 끝이 다보록하게 모여 피는 연꽃 같고, 횃불을 벌여 세운 것 같다”고도 했다. 이렇듯 속리산은 경치가 빼어나 소금강산이라고도 불렀다.

속리산의 최고봉 이름이 천왕봉이었다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속리산 정상에는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산 속에 사는 사람들이 매년 10월에 신을 맞이하여 제사 지낸 후 45일을 머물다가 돌아간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맥이 끊어진 속리산 천왕봉 산신제의 기록이다. 현재 이름은 천황봉으로 되어있지만 조선시대 고지도와 문헌에는 모두 천왕봉으로 표기되어 있다. 천왕봉은 지리산, 무등산, 비슬산, 장수산(황해도 재령), 천왕산(경남 고성)에 주봉으로 있다. 그런데 속리산을 포함하여 여러 산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천황봉으로 둔갑해 버렸다. 대구의 비슬산은 금년 8월에야 원래 이름을 되찾아 천왕봉으로 고시되었다. 속리산도 하루 빨리 천왕봉 이름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항간에 알려졌듯이 천황봉이라는 지명은 모두 일제가 개악한 것만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장수의 주산, 월출산의 주봉, 광양의 천황봉도 있었다.

속리산의 지형 경관을 내산과 외산으로 구분한 사실도 흥미롭다. 성해응의 <동국명산기>에 “복천사 동쪽을 내산이라고 하고 법주사 위쪽을 외산이라고 하는데, 내산에는 돌이 많고 외산에는 흙이 많다”고 적었다. 흙이 많다는 것은 농사 지을 수 있는 토양조건이 갖춰졌다는 뜻이다. 흔히 설악산도 내설악, 외설악 하듯이 속리산도 내속리, 외속리라 구분 지을 만하다.

 

속리산은 조선후기 지식인들도 주목했다. 신경준은 나라 12명산의 하나로 포함시켰고 이중환은 국토 등줄기의 8명산에 올렸다. 속리산의 명산 됨을 다른 산과 비교한 유학자들의 견해도 관심을 끈다. 이만부는 “속리산은 청량산의 수려함이 있으면서도 산세를 펼친 것이 그보다 크고, 덕유산의 심오함이 있으면서도 기이함을 드러낸 것이 그보다 낫다(<속리산기>)”고 했다. 보는 견지가 높을뿐더러 고개가 끄떡여지는 말이다. 이중환은 “온 산을 빙 둘러 이상스러운 골짜기와 별다른 구렁이 많아 금강산 다음이다”라고 했다. 속리산이 거느린 빼어난 골짜기 경관을 특별히 지적한 것이다.

“속리산은 기이하고 험준함이 금강산에 미치지 못하고, 웅장하고 심원함은 지리산에 미치지 못하지만, 왜 특별히 명산으로 일컬어지고 중국에까지 알려졌을까?” 박문호의 물음이다. 대답은 이랬다. “한강 남쪽의 모든 산이 다 이 속리산을 종마루(朝宗)로 한다. 신령한 기상을 품고 기르며, 높고 넓고 깊고 두터움은 여러 산이 비교할 바가 아니다.(<유속리산기>)” 이렇듯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산을 보는 인문학적 안목은 넓고도 깊었다. 서민들도 속리산에 기대를 걸었다. 십승지 중 하나가 보은 속리산 아래 증항 근처에 있다는 것이다(<정감록>).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란보신의 땅으로 속리산 언저리가 꼽혔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속리산의 지리적 위치와 수려한 경관, 삼재가 들지 않고 비옥한 농경지를 갖춘 삶 터 등이 하나로 뭉뚱그려져 우복동이라는 이상향이 생겨났다.

속리산에 가면 최고봉인 천왕봉보다 제 2봉인 문장대가 오히려 훨씬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족히 사람 50명쯤은 동시에 올라가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넓은 바위 봉우리이기 때문이다. 이 봉우리의 이름이 왜 ‘글월 문(文)자’가 들어간 문장대(文藏臺)가 되었을까?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세조 임금이 요양을 위해 속리산을 찾아왔을 때 어느 날 꿈속에 귀공자가 나타나 ‘인근의 영봉에 올라 기도를 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 일러 주었고, 다음 날 세조가 이곳에 올라 오륜삼강(五倫三綱)을 명시한 책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하루 종일 글을 읽었다고 해서 문장대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이후로 구름에 감춰진 봉우리 운장대(雲藏臺)가 글이 숨겨진 봉우리라는 뜻의 문장대로 바뀌게 된 것이다. 세조는 왜 속리산 꼭대기까지 올라갔으며, 멀쩡한 산 이름을 바꾼 것일까?

 

 

속리산은 속세와 이별하는 것(俗離)을 바라지 않지만 세속이 이 산을 감당 못하여 벗어나게 한다는 최치원의 유명한 한시가 있다. 그러나 근대인의 관점에서는 반대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듯싶다. 속세로부터 떨어지려 하는 것이 속리산 지리학임에도 세속의 욕망이 집요하게 이 산을 견인해내고만 있는 것이 아닌지.

 

속리산 국립공원은 한반도의 중심부에 우뚝 솟은 백두대간의 장대함을 지닌 한남금북정맥의 발원지로서 우리나라 팔경중의 하나다. 푸른 소나무와 잘 생긴 봉우리들로 유명하다. 특히 문장대에 3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속리산(해발 1058m)은 행정구역상으로 충북 보은군, 괴산군, 경북 상주시의 경계에 있다. 화강암의 기봉과 산 전체를 뒤덮은 울창한 산림은 천년고찰 법주사와 잘 조화돼 승경(勝景)을 이루고 있다. 최고봉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비로봉, 문수봉 등 8봉과 문장대, 입석대, 신선대 등 8대 그리고 8석문(石門)이 있다.

법주사지구 학소대 주변 은폭동계곡, 만수계곡, 화양동지구 화양동계곡, 선유동계곡, 쌍곡계곡과, 장각폭포, 오송폭포 등의 명소가 있다. 정이품송(正二品松·천연기념물 제103호), 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207호) 등 1055종의 식물과 까막딱다구리(천연기념물 제242호), 하늘다람쥐(천연기념물 제328호) 등 희귀 동물을 포함하여 1831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는 자연자원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보은의 얼굴로 일컬어지는 법주사는 속리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가 처음으로 창건하였다. 절의 이름은 ‘부처님의 법이 머문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창건 이래로 여러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쳤다. 성덕왕 19년(720)과 혜공왕 12년(776)에 중창하였는데 이때부터 대찰의 규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고려에 들어서도 그 사세를 이어 홍건적의 침입때는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왔다가 환궁하는 길에 들르기도 했다. 조선 태조는 즉위하기 전 백일기도를 올리기도 했으며 병에 걸렸던 세조는 암자인 복천암에서 사흘기도를 했다고 전해져 온다. 정유재란때는 충청도 지방 승병의 본거지였다 하여 왜군들의 방화로 모조리 불에 타버렸다. 그후 사명대사가 대대적인 중건을 시작하여 인조4년(1626)까지 중창이 마무리됐으며 이후에도 여러차례 중수를 거친 후 오늘에 이른다.

법주사를 비롯한 속리산 일대에는 보은의 지정 문화재 절반 이상이 몰려 있다. 그중 법주사에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팔상전(국보 제55호), 석연지(국보 제64호) 등 국보만도 석점이며 보물 9점, 지방 유형문화재 19점, 천연기념물 1점 등 많은 유산이 있다.

정이품송은 법주사 입구에 우뚝 서 있는 소나무로 수령이 약 600년이상 된다고 한다. 이름의 유래는 세조의 법주사 행차와 관련이 있다. 당시 세조를 모신 행렬이 이 곳을 지나고 있는데 소나무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어 앞으로 지나가기가 민망했다. 이때 세조가 “연(임금이 타는 수레) 걸린다”라고 말하자 소나무가 가지를 들어 올려 무사히 지나갔다고 한다. 세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이 소나무에 정이품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그 후로 이 소나무의 이름은 정이품송이 되었다. 최근엔 600년간 정이품의 벼슬을 했으니 이제는 정일품으로 승진시켜 줘야 하지 않느냐는 우스개 얘기도 회자된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가대표 소나무도 세월 앞에선 무상했다. 2007년 3월 강풍에 직경 30㎝, 길이 4∼5m의 가지가 부러지는 등 1993년 이후 강풍과 폭설 등으로 다섯 차례에 걸쳐 7~8개의 가지가 부러졌다. 그 후로 정이품송이 간직하던 좌우대칭의 빼어난 아름다움은 많이 잃은 상태지만 정이품송이 풍기는 본연의 그윽한 분위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1970년 3월 24일 국내에서 여섯 번째 국립공원(산악국립공원으론 4번째) 으로 지정된 속리산은 일찍이 해동 8경의 하나로 또는 ‘작은 금강산’으로 불려왔다. 신라시대 학자 고운 최치원(857-?)은 속리산을 탐방하고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세상을 멀리하지 않는데 세상이 산을 멀리하는구나! 라고 심장하게 읊었다고 한다.

백두대간의 산 속리산은 기암봉들로 이루어진 바위산이다. 멀리서 속리산을 보면 톱니바퀴 같은 울퉁불퉁한 바위들로 하늘선이 그려진다. 그러므로 얼핏 생각하기엔 감히 사람이 범접치 못할 험한 산 같지만 암봉 사이로 교묘히 사람이 드나들 틈새를 넉넉히 남겨두고 있다. 그래서 누구든 풍진 세상만사를 잠시나마 잊고 선경에 취해 속리 할 수 있게 하는 넉넉한 품을 가진 산이다.

속리산의 풍광은 아름답기 그지없어 산의 가인이라 할 만하다. 한마디로 말해 자연이 빚은 놀라운 바위 예술이다. 조선의 지리학자 이중환 선생은 택리지에서 속리산은 “석세가 높고 크며 여러 겹으로 된 봉우리의 모든 돌 끝이 뾰족뾰족하게 생겨서 마치 처음 피는 연꽃 같기도 하고 멀리서 횃불을 벌인 것 같기도 하다” 고 했다.

속리산은 8이란 숫자와 유달리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산의 이름도 광명산, 지명산, 구봉산, 미지산, 형제산, 소금강산, 자하산, 속리산 여덟 개에 이르고 천황봉을 비롯해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 수정봉의 8개봉을 지녔다. 또 문장대, 입석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신선대, 봉황대, 산호대의 8개의 바위 멧부리와 내석문, 외석문, 상고내석문, 상고외석문, 배로석문, 금강석문, 상환석문, 추래석문의 여덟 개의 석문이 있다

 

 

 

 

 

 속리산은 명산인지라 비경(秘境)과 역사가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나름대로 혼자서 잘 놀 수 있는 소일거리다. 산 중턱에는 한글 창제에 큰 역할을 했다는 신미(信眉)대사와 해인사 팔만대장경 판전을 현재 규모로 증축했다는 학조(學祖)대사의 부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고즈넉한 산길을 따라 참배하면서 가끔 부도 주변의 낙엽을 빗자루로 쓸어내기도 했다. 문장대(文藏臺)는 예로부터 시인과 묵객(墨客)의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았고, 문(文)·사(史)·철(哲)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문필봉(文筆峰) 대접을 받고 있는 명소이다. 오래전부터 과거나 고시·학위 등 큰 시험을 앞둔 이들이 합격을 기원하며 기도 삼아 다녀갔다.

 

 

충북 보은군과 경북 상주시에 접해 있는 속리산은 해발 1058m의 천왕봉을 주봉으로 비로봉(1032m), 입석대, 신선대, 문수봉, 문장대(1054m), 관음봉, 묘봉(874m), 상학봉(864m) 등 화강암 봉우리들과 울창한 수림이 잘 어우러져 전체적으로는 마치 활짝 핀 연꽃 봉우리를 연상케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옛 문헌에 따르면 속리산의 원래 이름은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九峰山)으로 기록돼 있다. 광명산(光明山), 형제산(兄弟山), 소금강산(小金剛山) 등 여러 별칭으로도 불렸다.

그러다 신라시대에 지금의 속리산으로 불렸는데 784년(선덕여왕 5년)에 ‘진표율사’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진표율사’가 이곳을 지날 때 밭 갈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럴진데 하물며 사람인 우리들이 그를 몰라 봤다’며 진표를 따라 속세(俗世)를 떠나(離) 입산수도했다는 데서 ‘속리’라는 이름이 유래됐다고 한다. 그러나 속리산은 700년 후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조선시대 세조에 의해 다시 세속(世俗)화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겪기도 했다.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세조가 속리산의 ‘정이품소나무’를 비롯해 목욕소, 문장대 등을 자신의 왕위 승계 합리화 도구로 활용(?)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속리산에 덧칠한 스토리텔링이 ‘자신의 집권이 하늘의 뜻’이었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철계단을 타고 문장대에 오르면 앞으로는 상주시고, 그 너머로는 보은군, 돌아서면 신선대와 천왕봉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세 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지는 문장대에 서면 속리산 절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문장대는 본래 구름 속에 잠긴다고 운장대(雲藏帶)로 불렸으나 세조가 이곳에서 신하들과 글을 논했다고 문장대(文藏臺)로 바뀌었다. 세조의 세속화 부산물인 셈이다.

산행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문장대에서 주능선을 타고 천왕봉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 하산하는 코스를 즐기기도 한다. 이 경우 2시간여를 보태 7∼8시간이 걸린다. 초행자들은 굳이 욕심낼 코스는 아니다. 그다지 험한 코스는 아니지만 체력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문장대에서 신선대~입석대∼비로봉∼갈림길∼천왕봉까지 주능선길은 ‘백두대간’으로 등산로가 뚜렷하고 완만한 편이다. 대신 암릉길이다. 그러나 우회로가 있어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다. 신선대 휴게소에서 천왕봉을 향해 동남쪽 주능선길을 따라 한 시간여면 갈림길이 나온다. 길림길에서 직진해 30여 분이면 정상인 천왕봉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막힘이 없다. 북쪽으로는 속리산 주능선 백두대간이 펼쳐지고 남동쪽으로도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끝이 없다.

충북 보은군과 괴산군, 경북 상주시 화북면에 걸쳐 있는 속리산은 태백산맥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나오는 소백산맥 줄기 가운데 솟아 있다.

784년(신라 선덕여왕 5년)에 고승 진표가 이곳에 이르자 밭 갈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고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러한데 하물며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느냐며 속세를 버리고 진표를 따라 입산 수도하였다 해서 속리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속리산 산행은 대개 법주사를 들머리로 한다. 그 너머 상주의 장암리에서 문장대로 치고 오르는 코스도 있지만 법주사를 거쳐 세심정에서 갈라지는 세 가닥 코스가 가장 선호된다.

보통 문장대를 올라 그대로 내려오거나 중간에 신선대에서 떨어지는 등산객이 가장 많다. 속리산의 최고봉은 천왕봉이지만 그보다 문장대(文藏臺·1054m)의 인기가 높다. 그래서인지 천왕봉은 좀 외로워 보이기도 하는데, 비로봉 옆 석문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길의 무언가 고적한 맛은 문장대의 화려함보다 깊이가 있다.

문장대를 일명 운장대(雲藏臺)라고도 부르는데 이유가 있다. 문장대에서 장암리 방면으로 운해가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아마 지형적 영향인 듯한데, 이 지역은 그 너머 법주사 사내리 방면에는 높은 구름이 몇 점 떠있는 날에도 운해가 형성되곤 한다.


문장대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정상 능선길은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명품’이다. 신선대와 입석대 등 기기묘묘하면서도 엄청나게 큰 바위 사이를 걷는 맛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여유롭게 2시간 정도 걸리는 정상 능선은 굴곡도 그다지 심하지 않은 편이어서 걷기에 좋다.

 

 

이중환은 이어서 소백산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백두산에서 태백산까지는 한 줄기의 영(嶺)으로 통한 까닭에 좌우에 다른 봉우리가 없다. 그렇지만 소백산 아래로는 자주 맥이 끊어지는데, 끊어져서 된 산은 속리산이 처음이다. 속리산은 석화성(石火星, 암봉들이 불꽃처럼 일어서서 산의 능선을 이루는 형상을 일컫는 말)이라 한다. 그렇지만 돌의 형세가 높고 크며, 겹쳐진 봉우리의 뾰족한 돌 끝이 다보록하게 모여서 마치 갓 피어난 연꽃 같고, 또 횃불을 멀리 벌려 세운 듯도 싶다. 산 밑은 모두 돌로 된 골이 깊게 감싸고돌아서 여덟 굽이 아홉 돌림, 즉 ‘팔곡구요’라는 이름이 있다.

산이 이미 빼어난 돌로 이루어졌고, 샘물이 돌에서 나오는 까닭에 물맛이 맑고 차갑기 그지없다. 빛도 또한 아청빛(검푸른색)이어서 사랑스러운데, 이 물이 바로 충주에서 남한강으로 접어드는 달천의 상류다. 온 산을 빙 둘러서 신비롭고도 넓은 골짜기가 많고, 그윽한 샘과 기이한 돌이 묘하고 아늑한 형상은 금강산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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