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과 동서를 막론하고 술에 관한 격언과 고사를 보면 술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경계론과 예찬론으로. 그러나 이제 술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도 한민족과 희로애락을 함께해 온 명주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포도주, 맥주, 위스키 등에 밀려난 지 이미 오래. 최근 우리의 전통주를 되살리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들의 꿈과 고집을 잠시 들여다봤다.
- 여기에 소개하는 술은 지역을 안배해 뽑은 것으로 이 밖에도 좋은 전통주가 많다는 사실을 부기해 둔다.》
[1] 감홍로 (甘紅露·경기 파주·증류식 소주)
전주 이강고, 정읍 죽력고와 함께 조선 3대 명주 중 하나. 평양 지역의 술이었으나 지금은 파주에서 이기숙 명인이 만들고 있다. 쌀과 누룩으로 빚은 술을 2번 증류한 뒤 한약재를 넣고 숙성시켜 만든다.
“남들은 자가용 타고 갈 때 힘들게 자전거 페달을 밟고 가는 기분이다. 여건은 아직도 어렵다. 감홍로는 그저 마시고 취하는 술이 아니라, 전통과 문화의 하나로 존중해 줬으면 좋겠다. 우리는 술병에 ‘감홍로’라는 이름을 새기지 않는다. 이름이 아니라 맛으로 선택받길 원하기 때문이다. 식품영양학과 식품공학(발효)을 더 깊이 공부해 가업을 잇겠다는 딸(27)과 아들(23)이 고맙다.” - 이기숙 명인(59)
[2] 동정춘 (洞庭春·강원 홍천·탁주)
조선시대 고문헌에 나오는 청주 동정춘을 탁주로 재현했다. ㈜산수의 안병수 대표는 발효 한약을 연구하다 누룩과 전통주에 빠져 아예 양조장을 차렸다. 쌀 함량이 높아 묵직한 단맛이 특징.
“물이 거의 들어가지 않아 논 1평에서 청주 한 병만 만들 수 있다는 귀한 술이다. 우리가 만드는 프리미엄 탁주는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나오는 제조법을 복원한 것이다. 첨가물이 전혀 없고, 지역에서 생산한 쌀로 빚는 것이 특징이다. 주로 고급 전통주점에서 팔고 있다. ㈜산수 같은 프리미엄 양조장이 벌써 50곳이나 생겼다. 꾸준히 노력하면 전통주 시장은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 안병수 ㈜산수 대표(44)
[3] 이화주 (梨花酒·경기 용인·탁주)
배꽃이 필 때 빚는 술이라는 뜻으로 배꽃이 들어가진 않는다. 쌀과 쌀누룩만으로 만드는데 요구르트처럼 걸쭉하다. 옛날에는 부유층이나 사대부 집안에서 즐겨 먹었다. ㈜술샘이 만들고 있다.
“요리사가 많이 찾는데, 전식이나 후식으로 내놓기가 편해서인 것 같다. 떠먹는 술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과일 맛을 첨가한 제품을 내놓았더니 반응이 아주 좋다. 유산균이 많이 들어 있어 특히 여성들이 좋아한다. 생협 ‘한살림’과 프리미엄 주점에서도 선호하고 있다. 쌀이 남아도는데, 쌀의 부가가치를 가장 많이 높일 수 있는 게 바로 술이다. 국가가 술 산업을 고민해야 할 이유다. -신인건 ㈜)술샘 대표(53)
[4] 면천두견주 (충남 당진 면천면·약주)
1000년 전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이 불치병에 걸리자 딸 영랑이 백일기도를 드린 후 진달래꽃으로 술을 담가 병을 치료했다는 전설 속의 명주. 담황갈색으로 점성이 있으며 맛이 부드럽다.
“10년 전부터 보존회를 만들어 활동 중이다. 내년 3월에는 전수교육관도 문을 연다. 학생들이 명절주를 만들어 제사상에 올리거나 부모에게 선물하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데 인기가 높다. 자생하는 진달래꽃이 많지 않아 놀고 있는 논과 밭에 진달래도 심고, 친환경농법의 찹쌀도 계약 재배 중이다.조금 비싸더라도 장인이 만든 문화소비재로 이해하고 많이 마셔주었으면 좋겠다.” - 김현길 면천두견주 보존회장(48)
[5] 한주 (汗酒·경기 안성·전통 증류식 소주)
소나무 마디를 넣어 빚은 약주를 송절주라고 하는데, 이를 증류해 얻은 소주가 한주다. 증류할 때 나오는 액체가 땀방울 같다고 해서 얻은 이름. 송절주 제조기능보유자 이성자 씨가 만들고 있다.
“면세점에서는 많이 나가는데, 국내에서는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과거에 복분자를 필두로 과실주가, 그 다음에는 백세주·천년약속 등 약주가, 얼마 전부터는 막걸리가 붐을 일으켰다. 마지막 남은 증류식 소주도 각광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현재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소주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 가격이 조금 비싼 것도 장애요인인데, 질을 보고 선택해 줬으면 좋겠다.” - 이준곤 이사(이성자 씨 차남·40)
[6] 풍정사계 (楓井四季·충북 충주)
‘풍정사계’는 ‘단풍나무 우물이 있는 동네에서 만드는 춘하추동 4가지 술’이라는 뜻. 이한상 대표가 궁중 누룩인 향온곡으로 10년 전부터 빚고 있다. 춘(약주) 하((과하주) 추(탁주) 동(증류식 소주)을 제조 중.
“춘이 기본주다. 그걸 잘 빚어야 나머지도 좋은 술이 된다.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어 다행이다. 나는 전통누룩을 갖고 옛날 방식으로 만든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나 지금은 안정적으로 만들고 있다. 고문헌을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걸 기초로 독자적인 술을 만들고 싶다. 청주(淸酒)라는 말을 일본 ‘사케’에 빼앗기고 ‘약주’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되찾아 와야 한다.” - 이한상 대표(61)
[7] 죽력고 (竹瀝膏·전북 정읍의 소주)
죽력은 푸른 대나무를 쪼개 항아리에 넣고 열을 가해 얻은 기름. 이 죽력에 꿀, 생강 등을 넣고 증류한 술이다. 그래서 술 주(酒) 대신 기름 고(膏)를 쓴다. 송명섭 명인이 만들고 있다.
“‘고(膏)’라는 것은 약재를 끓여 해로운 것은 밑으로 떨어뜨리고 증기에서 좋은 성분만을 모으는 방법이다. 이런 술 제조 방법은 세계에서 유일하다. 좋은 성분이 술에 녹아 있으니 흡수와 전파가 빠르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일본군에 잡혀 몸이 상했을 때 이 술을 마시고 몸을 추슬렀다고 한다. 최남선 선생이 조선 3대 명주 중 하나로 꼽았는데, 모든 이가 즐기는 술이 됐으면 한다.” - 송명섭 명인(56)
[8] 솔송주 (경남 함양·약주)
하동 정씨 집안에서 만들어온 전통 약주. 우리 쌀과 솔잎·송순을 청정 지리산의 맑은 물로 발효시켜 만든다. 강하거나 부담스럽지 않다. 은은한 솔향과 감칠맛이 특징이다.
“경남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술로 만들고 싶다. 질을 높이고 디자인도 개선해 미각과 시각을 모두 충족시키려고 노력 중이다. 남북정상회담이나 청와대의 만찬주로 쓰이고, 세계적인 술 품평회에서 매년 상을 받고 있는 것도 자랑이다. 최근 ‘담솔’이라는 40도짜리 증류주를 내놓았는데 국내외의 반응이 좋다. 일본의 ‘사케’를 능가할 때까지 계속 노력하겠다.”- 박흥선 명인(64)
[9] 하향주 (荷香酒·대구 달성군·약주)
연꽃 향기(荷香)가 난다고 하여 붙은 이름. 유래는 1000년 전 신라 고찰 유가사 기원설, 신라 성덕왕 때 비슬산 도성암을 중수할 때 인부들을 위해 빚기 시작했다는 설, 밀양 박씨 종갓집 술 등 여러 설이 있다.
“숙취가 거의 없는 술이다. 술 안에 아세트알데히드가 없기 때문인데, 서양술은 20, 30년간 숙성을 통해 그 성분을 빼내지만 우리는 술을 만드는 과정에서 없애버린다. 우리만의 노하우다. 중국 업체 몇 곳이 ‘술이 매우 좋다’며 수입을 고려 중이다. 우리 조상들은 예전에는 외국보다 더 술을 잘 빚었다. 그 전통을 살려 외국술이 차지하고 있는 고급술의 지위를 우리 술로 되찾고 싶다.”- 박환희 기능보유자(67)
[10] 자희향 국화주 (自喜香 菊花酒·전남 함평·약주)
고문헌에 나오는 ‘술의 향이 좋아 삼키기가 아깝다’는 뜻의 석탄향(惜呑香)을 재현한 술. 주원료는 찹쌀. 100일간 옹기에서 발효시켜 자연스러운 단맛과 향기가 특징이다.
“잊혀져 가던 좋은 술을 다시 알리는 데 보람을 느낀다. 지금까지 우리는 몰래, 거친 술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정말로 좋은 술, 고급술을 만들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국가가 우리 전통주를 외국에 알리는 데 적극적으로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 앞으로 명인도 되고 싶고, 술도 안정적으로 팔렸으면 좋겠다. 두 아들(30, 27세)이 이 일에 관심이 있는데, 애들이 세계적 수준의 술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노영희 대표(54)
[11] 제주 오메기술 (제주 서귀포시·약주)
제주도는 쌀이 귀해 쌀 대신 좁쌀로 술을 만들었는데 오메기술도 그렇다. 오메기는 술을 빚기 위해 만드는 둥그런 오메기떡에서 비롯됐다. 걸쭉하면서도 부드럽다. 제주무형문화재 3호.
“좁쌀에만 있는 특수한 성분과 좋은 효모들 때문에 몸에 좋은 술이다.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로부터 제조방법을 물려받았고 아들(24)도 관심을 보여 전통을 잇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 현재 판매는 하지 않고 시음만 할 수 있다. 큰 공장을 만들어 대대적으로 생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제주도를 대표하는 술로서 적당량을 생산해 유통시키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 - 강경순 명인(60)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
동아일보 / 입력 2016-12-24 03:00:00 수정 2016-12-24 03: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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