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를 둘러싼 갑론을박 희생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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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755년부터 사도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입니다. 그해 4월28일 사도를 진찰한 약방 도제조 이천보는 “동궁(사도)이 요즘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세가 있는데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그렇다고 합니다”라고 보고하지요. 증세는 점점 심해져 아버지 영조를 만나는걸 기피하고 옷을 입기 싫어하며 훗날엔 발작증세까지 보입니다. 1760년부터 사도는 나인들과 환관들을 죽이고 자살을 기도했으며 마침내 자기 아들인 은전군을 낳은 경빈 박씨를 때려죽이기에 이릅니다.
- 성벽에 난 구멍으로 내다본 수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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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볼까요? 경빈 박씨는 원래 숙종의 둘째 부인 인원왕후 김씨의 나인이었으며 이름은 빙애였습니다. 그런 빙애를 사도세자가 범하는데 윗사람이 부리던 나인을 건드리는 것은 윗사람의 물건을 취한 것과 똑 같은 금기사항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영조는 매우 분개했는데 평소 성품이 강직한 경빈 박씨는 사도의 비행을 자주 시아버지에게 고해바친 것입니다. 이걸 안 사도는 화가 나 1761년 자기 아내를 살해하는데 이런 사실은 사도의 다른 잘못과 함께 1년 뒤 나경언(羅景彦)에 의해 영조에게 보고되지요. 이렇게 사도세자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자 집권 노론은 환희작약합니다. 사도가 소론을 중용해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도의 약점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반격을 가할 기회를 맞게 됐다고 판단한 거지요. 나경언의 고발은 바로 이런 구도에서 나온 겁니다.
그렇다면 나경언의 고발은 무슨 내용일까요? 첫째 사도가 왕손의 어미, 즉 경빈 박씨를 죽였으며 둘째 여승(女僧)을 궁으로 불러들여 풍기를 어지럽게 했고 셋째 서로(西路)에 행역했으며 넷째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사도가 시전 상인들에게 돈까지 빌렸다는 내용은 훗날 영조가 대신 돈을 갚은 데서 밝혀지지요. 서로에 행역했다는 말은 관서(關西)지방을 관람했다는 뜻인데 이것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세자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예를 들면 기생파티 등)이나 반역을 꾀했다는 암시로 보면 무방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 영조의 허락 없이 떠난 북성의 유람도 비슷한 맥락이겠습니다. 영조는 나경언의 고발이 있은지 얼마 안 돼 사도를 뒤주에 가둬 죽였으며 나경언 역시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고 하지요.
일각에선 사도세자가 노론과 소론의 권력 다툼에서 희생양이 됐다는 설도 있는데 여기서 제가 인용하고 싶은 것은 역사평론가 이덕일 선생이 쓴 ‘사도세자의 고백’이라는 책에 나오는 특이한 분석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는데 골자를 볼까요? 이씨는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가해자라고 주장합니다. 즉 혜경궁 홍씨는 풍산 홍씨 일파를 대변하는 여걸인데 자신의 가문과 노론을 지키기 위해 남편을 희생시켰다는 거지요. 사도세자는 사실 소론의 지지를 받았기에 이런 설이 나오겠지요.
- 화성행궁의 정전 봉수전. 효자였던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이런 이름
- 을 붙였다.
- 화성행궁의 정전 봉수전의 내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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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소론을 등에 업고 노론을 치려 하자 노론 벽파가 나서는데 바로 이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인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과 혜경궁 홍씨였던 겁니다. 이들은 사도세자를 광인(狂人), 즉 미친놈을 몰았고 끝에 뒤주에 갇히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펄쩍 뛰지요. 혜경궁 홍씨는 정치적 인물이 아니며 사도가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했다지만 실권이 없었고 이덕일씨는 앞서 말했듯 노론의 벽파와 시파가 사건 당시 갈린 것으로 보지만 벽파-시파는 그 8년 후 분리됐다는 겁니다.
이런 파장만장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둔 정조는 어릴 적부터 스트레스, 즉 울화병이 극심했다고 합니다. 철저한 할아버지의 눈에 들어야 하고 11살 때 아버지의 비극을 견뎌내야 했으니 왕이 되면서 비극으로 점철된 한양을 떠날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정조가 이런 결심을 한 건 반대파가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 즉 죄인(사도)의 아들(정조)은 군왕이 될 수 없다며 나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정조는 아버지의 명예회복이야말로 자기의 정통성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조는 1776년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를 설치했으며 13년 후 양주 배봉산의 사도세자 무덤이었던 영우원(永祐圓)을 앞서 말한 수원의 현륭원, 즉 지금의 융건릉으로 옮깁니다. 아버지의 능을 옮긴 지 5년 뒤 정조는 다시 화성건설에 나섭니다. 정치개혁을 위한 자신의 새로운 지역적 기반, 그것이 바로 화성이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정조는 왜 수원 화성을 눈여겨보게 된 것일까요? 거기엔 17세기 실학자 반계 유형원의 혜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한양이 싫었던 정조는 신도시 화성으로의 천도를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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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팔달산 아래의 신읍(지금의 수원시)은 구읍(화성시)에 비해 지형상 그 규모가 크며 낮고 평평한 구릉만 있을 뿐 대부분 평야지대로 이곳에 축성해 읍치로 삼는다면 실로 대도회지로 발전할 수 있다”며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하지요. 즉 1만 호를 수용할 적지(適地)라고 한 것인데 실제 수원은 지형상 서울과 삼남(충청-경상-전라도)에 가까운 요충지였다는 것입니다. 훗날 이 글을 본 정조는 “반계야말로 오늘의 국사와 현실에 유용한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대학자”라고 격찬합니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며 한양 방비도 생각했습니다. 즉 한양을 중심으로 북쪽의 북한산성과 개성의 대흥산성, 서쪽의 강화도성과 문수산성, 동쪽의 남한산성에 남쪽의 수원 화성을 더하면 한양의 외곽방비체제가 완벽하게 확립된다고 본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정조는 중국 한당(漢唐)시대의 수도 장안(長安)을 모델로 삼았으며 몇몇 건물의 이름도 차용했습니다. 장안문-신풍루-장락당 등이 그것이지요. 수원 화성은 2년9개월이라는 초단기간에 완성됐는데 거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 수원화성의 정문인 장안문. 화성은 중국 장안을 본 딴 신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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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으로 쌓을 경우 인력이 많이 들어가 석축(石築)을 하려 했는데 기적적으로 성을 쌓기 한 달 전 팔달산 서쪽의 숙지산(熟知山ㆍ영복여고 뒷산)과 여기산(麗岐山)에서 석맥이 발견된 것입니다. 여기에 다산 정약용이 왕명을 받아 만든 거중기를 사용했으니 공기가 획기적으로 단축된 것이지요. 이렇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정조는 화성이 완공된 후인 1800년 6월14일 급사합니다. 새 세상을 만들자는 꿈이 건강 때문에 무산된 것인데 따지고 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가 원인이었습니다.
정조 사후 조선은 어린 순조가 외척들의 세도정치에 휘둘리면서 세계사에서 뒤처지게 됐고 정조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76년 만에 일본과 강화도 수호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맺으면서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합니다. 그리고 다시 34년만에 일본에 병합되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우리의 멀지않은 역사였습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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