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北漢山, 837m)의 옛 이름이 삼각산(三角山)이라는 사실은 누구라도 안다. 삼각산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부터 생겨났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그 삼각산이 북한산이다.
왜 김상헌(1570-1652)은 병자호란 때 볼모로 잡혀가면서 차마 못 잊어 삼각산을 부르고 있을까? 삼각산은 한양의 랜드 마크이기도 했지만, 한양 사람들이 삼각산에 대해 심정적으로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각산은 한양의 역사와 지리를 대변하는 상징이었다.
삼각산은 이름 그대로 세 봉우리(인수봉·만경대·백운봉)가 뿔(角)처럼 뚜렷하게 드러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시습(1435-1493)이 삼각산을 두고, “세 뿔 같은 높은 산봉 하늘을 꿰뚫으니…” 하면서 시작하는 시구(詩句)도 이런 시선의 반영이다.
옛 지도에서도 삼각산의 세 뿔 모습은 산 형상을 대변하는 아이콘(Icon)처럼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1840년대에 서울을 그린 김정호의 <수선전도>와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좌해도>의 경기도 지도 등에는 삼각산의 우뚝한 세 뿔이 실감나게 그려졌다(지도1, 지도2).
삼각산이라는 이름은 한양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팔도 전역에 분포하고 있었다. 고지도를 보면, 경남 울산과 기장의 경계에도 있고(조선지도 등), 전남 영광과 전북 광주에도 있다(비변사인방안지도 등). 평남 성천부‧개천군‧태천현(지승 등)과 평북 운산에도 있고(팔도군현지도 등), 강원 안협현(철원군 안협면)에도 있었다(해동지도 등). 경기 양주에서도 삼각산은 뚜렷하게 보여 고지도에 그려졌다. 진영(鎭營) 지도로서, 멀리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대부지도(대부도)에까지 삼각산의 모습은 강조돼 표현되어있어 흥미롭다(지도3).
한양의 삼각산은 일명 화산(華山) 혹은 화악(華嶽)이라고도 했다. “공중에 높이 솟은 세 송이 푸른 연꽃, 아득한 구름 안개 몇 만 겹 인고…”. 고려의 오순이 읊은 삼각산이다. 옛 사람들의 시심(詩心)어린 눈으로 비친 북한산의 모습이다. 삼각산의 세 봉우리 모습이 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하늘 높이 솟은 연꽃으로 비쳤다.
화산 명칭은 조선시대부터 생겨난 별칭이다. “화산 남(華山南) 한수 북(漢水北) 조선 승지(朝鮮勝地)…”로 시작하며 한양의 도읍지를 기린 변계량(1369-1430)의 <화산별곡>(1425), 그 화산이 북한산이다.
북한산이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원래 북한(北漢)이라는 말은 지리적으로 한강의 북쪽이라는 뜻이었고, 지역적으로 북한산성 일대 혹은 북한산성을 가리키는 약칭으로 쓰였다. <도성삼군문분계지도>에 삼각산 아래로 ‘북한’(北漢)이라 표현되고 있음이 확인된다(지도4). 그것이 조선후기에 산이름에 덧씌워져서 북한산이라고 부르게 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희(1786-1856)는 <진흥이비고>(眞興二碑考)에서, “진흥왕 순수비가 지금의 서울 북쪽 20리에 있는 북한산 승가사 곁의 비봉 위에 있다”고 적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와서 본격적으로 북한산이라는 이름은 삼각산과 함께 쓰이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이었던 중추원은 공식적으로 북한산이라는 이름을 써서 <북한산지지초략>(北漢山地誌抄略)이라는 산지(山誌)도 편찬했다. 이 책은 북한산에 순사주재소가 설치되면서 북한산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북한산이라는 산이름은 오로지 서울이 유일하다.
북한산의 자연경관과 역사경관이 상세하게 그려진 지도로 북한도(北漢圖)가 있다. 이 옛 지도는 <북한지>(北漢誌)에 딸려있는 3장의 그림이다. <북한지>는 1745년(영조 21)에 성능(性能)이 편찬한 북한산과 북한산성의 지리지이다.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북한산의 자연경관, 문화유적, 역사건축 등이 망라되어 소개되었다.
북한도(지도5)를 보면, 인수봉을 가운데로 좌우의 만경대·백운봉이 뚜렷하고, 앞으로 노적봉이 있다. 노적봉이라는 이름은 한국에서 흔한 봉우리 이름이다. 신경준(1712-1781)은 <산수고>(山水考)에서 “(삼각산 노적봉은)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마치 노적가리와 같아서 노적봉이라 이른다.”고 했다. 노적봉이라는 이름은 풍요로움을 표상하고 염원하는 상징성이 산봉우리에 투영된 것이다.
노적봉 왼편 아래로는 산성 내 사찰인 중흥사(中興寺)가 그려져 있다. 중흥사는 고려 말에 태고 보우가 중창하고 성능이 팔도도총섭으로 있으면서 크게 중건한 대표적인 사찰이다. 오른편 아래로는 띠처럼 두른 성곽과 함께 중성문(中城門)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지도5).
조선시대에 와서 북한산은 최고의 영광에 달했다. 서울이 조선의 왕도가 되면서 삼각산은 한양의 진산(鎭山)이자 나라의 으뜸 산이 되었다. 조선중기의 관찬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에 “삼각산은 경성의 진산”이라고 분명히 표기하고 있다. 한양 도성을 지켜주는 산의 표상으로 지정된 것이다.
신경준은 나라의 열 두 명산을 지정한 바 있는데, 그 중에서 삼각산을 첫 번째로 쳤다. “삼각산을 (나라) 산의 우두머리로 삼은 것은 서울을 높인 것”이라고 했다. 백두산마저도 두 번째의 산이었다.
사실 신라 때만 하더라도 북한산은 소사(小祀)에 올랐던 그리 중요한 산이 아니었다. 지리적으로도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산이 고려시대에 남경(南京)이 되는 덕에 국가의 손꼽히는 명산 반열에 들더니, 조선조에 와서는 하루아침에 나라의 진산이요, 으뜸 산이 된 것이다.
삼각산은 조선시대에 와서 나라의 산천 제의로서는 가장 격이 높은 중사(中祀)로 올랐음도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확인된다. 이런 삼각산은 혹시 무너지거나 변고(?)나 없는지 언제나 관찰의 대상이었다. ‘1556년(명종 11) 정월 임오에 삼각산 백운봉의 허리 부분에 있는 암석이 무너졌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이러한 정황을 잘 보여준다.
북한산은 한양 도성의 방어를 위해서도 전략적 요충지임이 분명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겪은 조선 왕실은 북한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정작 산성의 축성은 조정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루어지다가, 숙종 37년(1711) 봄에서야 공사가 시작되어 그 해 가을에 완성되었다.
숙종은 도성과 가까이에 있는 북한산성이 수비에 있어서의 용이함과 효율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성은 넓고 커서 수비하기가 어렵고, 남한산은 나루를 건너기가 어려우며… 오직 북한 지역만은 지극히 가까운 까닭에 백성과 더불어 들어가 수비하려고 하니, 군량을 조치하는 등의 일은 이들 먼 지역과는 달리 어렵지 않을 듯하다.”(<숙종실록> 37년 2월 갑자)
한성의 진산인 북한산에 대한 조선왕실의 보전과 관리는 매우 철저하고 엄격했다. 세종 20년(1438)에 북한산에서 북악으로 이어지는 줄기의 내맥(來脈)을 보토(補土)하도록 한 적이 있다. 세종 27년(1345)에는 삼각산과 청량동 및 중흥동 이북과 도봉산의 벌채를 금해 산지를 보전토록 했다. 한양 도성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보전에 각별한 주의를 한 것이었다.
급기야 세조 9년(1463)에는 백두산에서부터 백두대간의 등줄기를 거쳐 삼각산 보현봉~백악에 이르는 맥을 주맥으로 파악하여 돌 캐는 일을 금하기까지 했다. 서울까지 이르는 산줄기이기 때문이었다. 조선 초기부터 한양의 산줄기 축을 백두산에서 북악산에 이르기까지 거시적으로 파악해 훼손을 금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양 도성의 산지관리를 위한 법제적인 장치도 마련했다. <경국대전>에 ‘경복궁과 창덕궁의 주산과 내맥의 산등성이와 산기슭에는 경작을 금한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북한산 관리의 사상적 저변에는 풍수사상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북한산은 서울 시민들이 반드시 보전하고 가꾸어야 할 이유가 있다. 생명의 기운은 산에서 생성되고 산의 맥을 통하여 삶터로 흘러들어 사람 생명의 원천이 된다고 풍수는 가르친다. 서울의 생명줄은 백두산에서 비롯되어 백두대간에서 한북정맥의 줄기를 타고 내려와 사패산으로 이어지며 다시 도봉산과 북한산으로 이어져 서울의 터전에 생기(숨)를 불어넣는 형국이다.
서울의 생태적 환경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축(主脈)이자 네트워크는 한북정맥 줄기요, 특히 서울에 인접한 북한산이다. 그것은 서울이라는 둥지에 터 잡고 사는 사람들과 생태계를 유지하는 태반일 뿐만 아니라 탯줄과도 다름없는 것이다. 산수지도라는 정체성이 뚜렷하게 표현된 <대동여지도>를 보아도, 서울의 터전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맥이 생생하고도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다(지도6).
일찍이 1983년에 국립공원으로까지 지정된 북한산이 오늘날 어떤 역할을 하고 있고, 그 가치를 매기면 도대체 얼마나 될까? 경제적 가치로 환산해도 천문학적 수치가 나온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북한산은 서울 시민들의 헬스장이자 힐링장소”라는 <월간 산> 박정원 부장의 말은, 오늘날 시민들에게 북한산이 무엇인지를 적실하게 표현한다. 북한산이 없는 서울을 생각할 수도 없는 까닭은 서울이 존립할 수 있는 자연적 바탕이요 지형적 근본이기 때문이다.
서울시 총괄건축가 승효상 씨는 오늘날 서울의 도시정체성을 산과 관련지어 이렇게 진단한 적이 있다.
“인구 천만 도시가 전 세계에 스물다섯 곳 있습니다. 3,500만 인구의 중국 충칭을 제외하면 산이 있는 도시는 서울이 유일합니다. 서양 도시는 평면으로 이뤄진 계획도시입니다. 서울은 다릅니다. 산지가 많습니다. 배산임수(背山臨水), 그러니까 산 때문에 수도가 된 것입니다. 서양문화가 들어오면서 평면의 도시가 들어왔습니다. 엄청나게 짓고 부수었죠. 서양 도시를 닮으려 한 게 지난 수십 년간 서울의 도시계획이었습니다. 서울의 정체성이 망가진 것이죠.”(<오마이뉴스> 2014.9.18)
다시금 우리는 산에 대한 인식의 전환기에 서 있다. 1960∼70년대의 산은 개발 이데올로기라는 경제적인 잣대로 평가된 없애야할 장애물이었다면, 80년대의 과도기를 거쳐 90년대 이후의 산은 자연생태적인 사조(思潮)로서 보전해야할 보고(寶庫)가 됐다. 이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산은 우리의 삶과 정신이 깊숙이 배어있는 생명적, 인문적인 가치로 까지 매겨져야할 전환점에 와 있다. 우리의 오래된 미래로서, 사람과 함께 진화하는 공존과 상생 관계로서의 산 말이다.
<최원석 교수의 옛지도로 본 山의 역사>
- BY pichy91 on 6. 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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