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3월이면 전남 광양시 다압면 매화마을은 야단법석이다. 섬진강을 끼고 백운산 자락에 터잡은 이 작은 마을에 평균
70만~100만명 정도의 관광객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올해로 17회째를 맞은 ‘광양국제매화문화축제’ 이야기다. 매화꽃 흐드러진 산꼭대기에서
일출을 맞겠다고 새벽부터 몰려온 사람들, 일몰을 감상하려 저녁까지 남아있는 가족들, 꽃잎 흩날리는 매화터널을 다정하게 걸어가는 연인들 등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다들 매화꽃에 취해 탄성을 터뜨린다. 하지만 도대체 언제부터 그리고 왜, 이 동네가 매화마을이 된 건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마을 한 가운데 ‘홍쌍리 청매실농원’이 있다. 그곳에 들어선 관광객들은 끝이 안 보이는 수천 개의 간장ㆍ된장독과 영화 ‘취화선’을 찍은
그림 같은 초가집, 하늘을 찌를 듯 서있는 대나무 숲과 온갖 야생화, 그리고 매화꽃들의 조화에 눈이 휘둥그레질 뿐이다.
‘홍쌍리’는 이 마을 이름이 아니다. 사람 이름이다. 1965년 당시 두메산골이던 이 마을에 시집와 평생 매화나무를 심고, 매실로
먹거리를 만들어 결국 대한민국 제14호 전통음식 명인으로 지명되고 이웃들이 덩달아 매화나무를 심으면서 동네 전체가 매화마을로 불리게 만든 홍쌍리
대표(72세)의 이름이다.
50여년에 걸친 집념과 정성으로 해마다 1백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오는 마을을 탄생시켰다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부산에서 이곳으로 시집을 왔는데 너무나 외로워 도저히 못 살 것 같았어. 와보니 남편은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하더라꼬. 물 길러 갈라면 항아리 끼고 꼬불꼬불 가도 끝이 없어. 머리에 이고 오다 앞에고 뒤에고 쏟고 치마는 젖어가 엉망이 돼가꼬 주저앉아
울었어. 근데 바윗돌 사이 양지 바른데 매화 한 송이가 나풀나풀 하면서 울지 말고 자기랑 같이 살자고 하는 것 같은 거야. 그 앞에서 하염없이
울고 나니 속이 후련하더라고. 정신 차려 보니 멀리 섬진강 위에 새벽안개가 솜이불 덮은 것 같고 그 뒤에 지리산이 감싸고 있네. 이 아름다운
곳에 꽃 천국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불러들이자. 그럼 안 외로울 것 아닌가. 이런 맘이 들더라고.”
새댁 홍쌍리는 시집 온 다음해
2월 눈 속의 매화, 설중매(雪中梅)를 처음 봤다고 한다. “설쇠고 바로 눈 속에서 꽃이 피더라고. 너무 아름다운 거야.” 매화에 반한 새댁은
집 뒷산에 틈날 때마다 매화나무를 심었다. 매화나무와 꽃을 보면서 힘든 농사일과 시집살이의 위안을 삼았다. “시아버지는 일본서 사업도 했던
분이고 똑똑하셨어. 집 뒷산 수 만평에다 밤나무를 많이 심어 그걸 팔아 수익도 적잖이 올렸지. 그런데 내가 밤나무 잘라내고 거기에다 매화나무
심으니 펄쩍펄쩍 뛰셨어. 그러면서도 내가 심은 나무를 잘라내진 않으셨어. 나를 친딸보다 더 아껴 주셨어.” 처음엔 외로움을 달래고 꽃을 보기
위해 심은 매화였지만 열매도 알면 알수록 신기했다. “밭을 매다 매실을 주워 주무르면 손에 물든 흙물, 풀물이 지는 거야. 모기 물린 자리에
문지르면 금세 안 가려워지고. 집에서 닭을 여러 마리 키웠는데 매실을 먹이면 병도 안 걸리더라고. 소화가 안될 땐 따끈한 매실 농축액 타먹고
아랫목에서 몸을 데우면 금방 내려가. 너무나 신기한 거야.”
만병통치약 같은 매실, 밥상 올려 매일 먹게 하자
매실은 그냥 두면 상하기 때문에 농축액을 만들어 커다란 항아리에 숙성시켰다. 그게 만병통치약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체하거나 머리가 많이 아프거나 감기에 걸리거나 설사를 하면 매실액을 얻어가려고 홍 대표 집을 찾아왔다. “이렇게
좋으면 아플 때 약으로만 먹을 게 아니라 어떻게든 밥상에 올려야 매일매일 먹을 게 아이가, 그래서 궁리해 낸 게 장아찌야. 6월이면 나무에
올라가 매실을 따고 농축액 만들어서 항아리에 담아두고 장아찌도 여러 종류 만들고 그랬제. 장아찌 만들고 나니까 매실 고치장, 매실 된장은 쉽게
만들었어. 매실 정과랑 매실주도 만들고.”
홍씨 본인도 매실 덕분에 살아났다. 1979년,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류머티스 관절염이 찾아왔다. 목발을 짚고 걷고 혼자서는 밥 먹기도 힘들었다.
병원에 다녔지만 차도는 없었다. “우리 집에서 매실을
약재로 사가는 한의사가 나보고 매실물을 장복하래. 그때부터 침 맞으면서 매실 농축액 희석한 물을 매일 2리터씩 마셨어. 조금씩 팔다리가
편안해지더니 2년 반 만에 거짓말처럼 병이 나았어.”
매실의 효능을 확신한 홍 대표는 전국을 돌며 항아리를 사 모았다.
“플라스틱은 냄새가 나고, 유리는 큰 게 없고, 쇠는 매실과 안 맞제. 우리 조상님들의 옛날 항아리들을 사 모았어. 경상도
항아리는 좀 길고, 전라도 항아리는 좀 동글동글한데 섞어 둬도 정말 이쁘지. 193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것들을 주로 샀는데 지금 2,500개
정도 가지고 있지.” 매화를 심기 시작한 지 30여년이 넘으면서 홍씨 집 뒷산은 광양 일대에서 매화꽃으로 유명해졌다. “산꼭대기까지 심으려고 한
건 아니었어. 한데 우리 집에 들른 법정스님이 ‘보살아, 저 위까지 매화를 심어라’ 그러시는 거야. 나는 ‘스님, 힘들어서 어떻게 올라가요. 안
해요’라고 했어. 한데 법정스님이 계속 하라셔. 스님 말씀대로 산 위에도 매화를 심어 이렇게 된 거야.” 홍 대표의 집을 방문하는 유명인사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매실주와 매실 장아찌, 된장과 고추장, 매실 먹고 자란 닭백숙을 맛 본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사업을 권유했다.
1994년 ‘홍쌍리 청매실농원’이 문을 열었다. 매실 원액과 매실 장아찌, 고추장, 된장 등을 팔았다. 첫해 매출은 3천만원.
하지만 입 소문이 나면서 주문이 폭주했다. 홍 대표는 사업을 시작한 다음 해인 1995년 청매실농원 축제를 열었다. 찾아온 손님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매실주도 공짜로 주고, 돼지고기 수육이랑 묵은지를 대접했다. 첫해에 3천명이 넘게 왔다. 다음해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홍씨가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광양시가 나섰다. 그래서 1997년부터 광양국제매화문화축제로 이름을 바꿔 행사가 이어진 것이다. 그는
1996년 새농민상과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1997년에는 전통식품 명인으로 지정됐다. 1998년에는 석탑산업훈장과 대통령상까지 수상했다.
수십년 함께 한 밀짚모자와 장갑, 보물보다 더 소중해
홍씨는 지금도 새벽 5시면
일어나 저녁 7시까지 구부정한 허리로 밭을 매고 벌레를 잡아주며 직원들과 함께 일한다. 집에 돌아오면 텅 빈 방에 혼자 앉아 시도 쓰고 글도
쓴다. 평생 지켜본 자연, 땅과 맺어진 자신의 삶, 야생화들, 매화꽃들이 모두 무궁무진한 글감이다. 수십년을 써 너덜너덜해진 밀짚모자와 장갑,
삼베옷, 고무신, 털신 따위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이제는 편히 쉬라고 서랍 속에 넣어두고 가끔씩 꺼내 봐. 이 낡은 것들은 황금보다 소중한
내 보물들이야. 그 긴 세월 동안 내가 울고 웃을 때 땀과 눈물을 닦아줘서 고맙고, 지금까지 같이 잘 살아줘서 고맙지.”
홍씨의
매실제품들이 성공하자 대량 유통이 가능한 제품을 같이 만들어 팔자는 제안이 큰 회사들로부터 적잖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싫어. 그러려면 방부제를 넣어야 한다고.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아. 이 산에서 머슴살이를 한지 반 백년이야. 처음엔 여기서 우째 살것나
생각했는데 이젠 나를 농사꾼으로 만들어 주신 게 참말 고맙고 행운이라고 생각해. 자연 속에서 일하고 땅의 주인이자 일꾼인 이 직업이 나는 너무
좋아.”
박성용 sypar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