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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성, 언제부터, 누가, 왜 쌓았고, 어떤 형태가 있으며, 몇 개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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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굴재사람 2014. 6. 27.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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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성, 언제부터, 누가, 왜 쌓았고, 어떤 형태가 있으며, 몇 개나 될까?



남한산성이 남한의 문화재 중에 11번째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등재,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새삼 남한산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관련 우리나라에 산재해 있는 ‘한국의 산성’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중국 역사서 <사기(史記)>에 한국의 산성에 대한 첫 기록이 나온다. BC 108년 한(漢)나라 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할 때 위만조선의 마지막의 왕이자 위만의 손자인 우거(右渠)가 왕검성에서 1년 가까이 저항하게 된다. 이를 ‘우거는 험하고 견고한 것만 믿다가 나라의 대가 끊어지게 됐다’고 했다. BC 108년에 이미 견고한 산성이 축조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이후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는 산을 의지하여 성을 축조하였기 때문에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다’고 나와 있고, <고려사>에서는 ‘당감에는 고려에서 산을 이용하여 성을 축조하는 것을 상책이라 하였으니, 외방의 평지에 성을 축조하는 것을 마땅히 정파시켜야 한다’고 기록하며, 산성축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만큼 한반도에서 산성의 역사는 오래됐다. 그리고 그 수도 엄청나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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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성은 산정상 부위에 쌓은 산정식과 산줄기와 계곡을 같이 아우른 포곡식으로 나뉘며,
산지가 험할수록 포곡식의 형태를 많이 띤다. 남한산성은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으로 꼽힌다.



한국에 산성이 과연 몇 개나 될까? 그 산성을 누가, 왜 축성했을까? 우리나라 산에는 산성이 왜 그리 많을까? 역사에 관심이 있거나, 산에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산성이다.

특히 한국의 산성 중에 대표적인 남한산성이 유네스코로부터 세계유산 ‘등재(Inscribe)권고’ 판정을 받은 상황이라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등재권고 판정을 받은 문화유산이 한 번도 세계유산에 등재되지 않은 적은 없다. 충북지역에서도 상당산성 등 충청권의 산성을 묶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의 산성은 한민족의 역사를 보면 어느 정도 파악된다. 한반도에는 약 BC 1,000년쯤부터 부족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다. 아직 국가로 통일이 되지 않은 상태의 부족국가는 다른 부족으로부터 침범을 막기 위해 산을 중심으로 성벽을 쌓았다. 일종의 방어망이었다. 이것이 한국의 산성의 출발점이다. 한반도 산성의 역사가 대략 3,000년 전쯤 된다는 얘기다.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에 해당한다.

한반도에 부족국가는 무수히 많았다. 삼국시대의 일종의 지방 호족적 성격을 띤 부족국가였다. 마한․진한․변한으로 대표되는 삼한과 이들을 구성하는 부족국가, 그리고 가야와 가야를 둘러싸고 있는 부족국가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들이 쌓은 산성은 지금까지 대략 2,000여개쯤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5~1997년에 걸쳐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조사한 결과를 담은 <문화유적총람>에 따르면 남한에 있는 성곽은 총 2,137개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후 확인된 산성을 합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조선 세조 대의 집현전 학자인 양성지(梁誠之)가 올린 상소문에는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입니다”라고 밝힌 내용도 설득력 있는 기록이다.

한국의 산성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는 1,000여년의 기간 동안 산성은 통치자들의 피난처이자, 지역도시와 거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구조물, 접경지역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벽의 역할을 수행했다.

평상시의 산성은 무기와 식량을 저장하고 전시에는 피난처로 사용됐다. 산성이 산악지형의 지리적 이점을 효과적으로 잘 활용했다. 한국의 산성은 산등성이를 따라 축성되어 불규칙한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멀리서 보면, 전체 구조물이 자연환경에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성곽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확인하기 어렵게 축성돼 있다. 이러한 인상적인 성벽이 산과 절벽을 따라 축성됐고, 우월한 방어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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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은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동시에 공격하는 기능까지 갖춘 요새로서 역할을 했다.



한국 성곽의 근본적 강점은 자연 지형을 최대한 유리하게 활용하고 자연환경을 고려하여 산악지형에 맞게 성벽을 축성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침략군들은 산을 오르면서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해야 했고, 이들이 도착했을 때 돌과 화살의 공격을 맞닥뜨려야 했다.

산성은 시대별로, 국가별로 조금씩 다른 형태를 보인다. 산성 축성 초기는 토성의 형태를 많이 보인다. 고구려의 국내성, 개경의 대부분이 토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백제의 풍납토성․몽촌토성․공산성․사비성, 신라의 월성 등도 토성으로 축성했다.

석축산성의 시원은 확실치 않지만 오녀산성이 석축으로 이뤄져 주목 받은 적이 있다.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비교적 지표조사가 잘 이뤄진 대전․충남의 경우 산성 307개소 중 토축산성 116개소, 석축산성 169개소, 토석혼축 15개소 등으로 석축산성이 훨씬 많은 수를 보였다.

또 서울․경기․인천 지역의 성곽 현황에 따르면 299개소의 성곽 중 석성이 136개소, 토성이 73개소, 토석혼축성이 29개소, 미확인 59개소로 석축산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사실을 확인했다. 한양도성의 경우도 세종대에 이르러 68%에 달했던 토축성벽을 모두 석축화했다.

이 같은 사실은 <산성으로 보는 5000년 한국사>를 쓴 이덕일․김병기씨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고조선에서 시작된 우리의 산성은 고구려․백제와 신라, 고려,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차이를 보입니다. 물론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점은 똑 같으나 백제는 토성이 더 발달했고, 고구려는 석축성이 더 많이 보입니다. 반면 신라는 지역에 따라 석성과 토성이 혼재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대체적으로 초기의 산성은 토성, 후기는 석성으로 된 형태가 많이 보입니다.”

산성은 축성형식에 따라 명칭도 다르다. 산성이 위치한 입지조건과 성벽의 통과선이 지나가는 지형을 기준으로 산정식(山頂式 또는 테뫼식)과 포곡식(包谷式)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눈다. 이 두 가지 형식을 복합한 복합식도 있다.

산정식은 평탄하게 생긴 산정상부를 둘러서 성을 구축한 경우를 말하며, 산봉우리를 둘러싸서 마치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것처럼 원형으로 성벽을 구축한 것을 테뫼식이라고 한다. 또 산정상부에서 시작하여 한쪽 산에 걸쳐 원만하게 경사된 지형을 이용해서 비교적 넓은 면적을 포함해서 구촉된 것을 산복식(山腹式)이라 부른다.

포곡식 산성은 성내에 한 개 또는 그 이상의 계곡을 두고 그 주위를 둘러싼 산줄기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한 경우를 말한다. 성벽의 통과선은 능선으로부터 평지에 이르러 다시 평지에서 능선으로 올라, 기복에 있어 변화가 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눈앞에 둔 남한산성도 포곡식에 해당한다. 내부에 넓은 계곡이나 수원(水源)을 포괄한 만큼 산정식보다 훨씬 광대한 규모를 이루고 있다. 특히 산악지형이 험한 고구려 산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복합식 산성은 산정식과 포곡식이 결합해서 축성된 경우를 말한다. 이들은 규모에 있어 협소할 수밖에 없는 산정식 산성에, 그것을 확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접한 지형에 포곡식 산성을 접속해서 개축한 새로운 형태를 산성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산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나라를 세우기 전에 이미 무수히 많았던 부족국가들이 자국의 방어와 대피를 위해 산에 축성하기 시작한 것이 삼국시대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고, 이후 석축으로 개조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 출처: 박정원 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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