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우치다
- 이성부 -
정상에서 찍은 사진 들여다볼 때마다
이 산에 오르면서 힘들었던 일 사진 밖에서도 찍혀
나는 흐뭇해진다 꽃미남처럼
사진 속의 나는 추워 떨면서도 당당한 듯 서있는데
먼 데 산들도 하얗게 웅크리고들 있는데
시방 나는 왜 이리 게으르게 거들먹거리기만 하는가
눈보라 두눈 때려 앞을 분간할 수 없고
세찬 바람에 자꾸 내 몸이 밀리는데
한걸음 두걸음 발 떼기가 어려워 잠시 주저앉았지
내 젊은 한시절도 그런 바람에 떠밀린 적 있었지
밤새도록 노여움에 몸을 뒤치다가
책상다리 붙들고 어둠 건너쪽 다른 세상만 노려보다가
저만치 달아나는 행복 한줌 붙잡을 엄두도 내지 못했지
능선 반대편으로 내려서서 나도 몸을 피하면
언제 그랬냐 싶게 바람 잔 딴 세상
편안함에 나를 맡겨 제자리 걸음만 하다가
가야할 길이 많은데 마음만 바쁘다가
안되겠다 싶어 다시 눈보라 속으로 나아갔지
어려움의 되풀이가 나에게 새로운 눈 뜨게 했음인가
봉우리에 올라가 되돌아보니
칼바람 속에서라야 내 살아 있음의 기특함이 잘 보이고
그것이 큰 재미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자꾸 사진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면서
눈 많이 오는 날
이 산으로 다시 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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