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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우치다

글모음(writings)/좋은 시

by 굴재사람 2013. 10. 9.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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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우치다

 

                                - 이성부 -

 

 

정상에서 찍은 사진 들여다볼 때마다

이 산에 오르면서 힘들었던 일 사진 밖에서도 찍혀

나는 흐뭇해진다 꽃미남처럼

사진 속의 나는 추워 떨면서도 당당한 듯 서있는데

먼 데 산들도 하얗게 웅크리고들 있는데

시방 나는 왜 이리 게으르게 거들먹거리기만 하는가

눈보라 두눈 때려 앞을 분간할 수 없고

세찬 바람에 자꾸 내 몸이 밀리는데

한걸음 두걸음 발 떼기가 어려워 잠시 주저앉았지

내 젊은 한시절도 그런 바람에 떠밀린 적 있었지

밤새도록 노여움에 몸을 뒤치다가

책상다리 붙들고 어둠 건너쪽 다른 세상만 노려보다가

저만치 달아나는 행복 한줌 붙잡을 엄두도 내지 못했지

능선 반대편으로 내려서서 나도 몸을 피하면

언제 그랬냐 싶게 바람 잔 딴 세상

편안함에 나를 맡겨 제자리 걸음만 하다가

가야할 길이 많은데 마음만 바쁘다가

안되겠다 싶어 다시 눈보라 속으로 나아갔지

어려움의 되풀이가 나에게 새로운 눈 뜨게 했음인가

봉우리에 올라가 되돌아보니

칼바람 속에서라야 내 살아 있음의 기특함이 잘 보이고

그것이 큰 재미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자꾸 사진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면서

눈 많이 오는 날

이 산으로 다시 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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