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엔 없는 게스트하우스의 오묘한 매력
제주도는 흔히 '게스트하우스 천국'으로 불린다. 게스트하우스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자, 여행자들이 홀딱 빠질 정도로 매력적인 곳들이 깔려 있다는 뜻이다. 4~5년 전 올레길 주변에 하나둘 생기기 시작한 제주 지역 게스트하우스들은 이제 200여곳으로 급증했다. 도미토리(다인실 숙소)를 기본으로 갖춘 게스트하우스들은 1~2년 새 전국으로 확산(<한겨레> esc 2012년 11월29일치 6면)돼, 대도시나 유명 관광지 기차역 부근에 한두 군데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젊은층의 새로운 여행 아이템으로 자리잡은 게스트하우스엔 어떤 매력이 숨어 있는 것일까. 하루 1만5천~2만원의 잠자리,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의 밤과 낮을 지켜보고 왔다.
지난 2월1일 저녁 7시,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 소낭 게스트하우스. 장작난로가 피워진 휴게실로 젊은 남녀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날 소낭의 도미토리에 잠자리를 정한 20여명 중 16명, 저녁식사 겸 파티 참가를 신청한 게스트들이다. "자, 멀뚱하게 앉아 있지들 말고 서로 인사합시다." 솔잎삼겹살을 철판 가득 구워 가지고 들어온, 촌장(주인장) 유영규씨가 분위기를 잡는다. "몇살인 누가 어디서 왜 왔는지를 소개"하되 나이에서 20년을 빼라고 주문(소낭의 전통이란다)했다.
"천안에서 온 2살 먹은 김진영이에요." "전 부산서 왔고요. 11살 정성윤입니다."…. 동심으로 돌아간 듯 수줍고 또 씩씩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참가자 16명은 (공교롭게도) 남녀 각 8명씩이다. 22~36살의 선남선녀들. 이들은 왜 이런 기이한 자기소개를, 하필이면 한라산 동북쪽 1132번 국도변 200년 묵은 소나무가 아름답다는 소낭 게스트하우스 휴게실에서 하고 있는 걸까. "외롭고" "바람이 쐬고 싶고" "재충전이 필요"한데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싶어서" 찾아와 각자 떠돌다 만난 청춘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날, 각자 걷거나 대중교통으로 또는 자전거·스쿠터·렌터카를 빌려 타고 곳곳을 둘러본 뒤 모여든 나홀로 여행자들이다.
휴게실 기다란 식탁으로 옮겨앉은 나그네들은 일제히 막걸리잔을 들어 건배한 뒤 솔잎삼겹살과 된장국, 야채를 곁들여 식사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조심스럽던 분위기는, 비바람 속에 올레길 걷던 얘기, 어려워지는 취업 얘기, 외국 여행담으로 이어지며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각자 지닌 사연과 애환은 달라도, 표정들은 해맑고 밝고 따뜻했다. 마음을 터놓고 나누는 대화에서 같은 처지 여행자로서의 공감대가 느껴지는 자리였다.
수원에서 왔다는 박혜정(30)씨는 "지난해 처음 혼자 왔을 때 재미있게 지낸 추억이 있어 다시 들렀다"며 "금세 언니·동생 하며 친해져 여행정보는 물론, 삶에 도움 되는 이야기도 나눌 수 있어 좋다"고 했다. 파티는 11시까지로 제한되고, 바로 각각 남녀 도미토리로 입실해야 한다. 지나친 음주를 막고, 먼저 잠자리에 든 이들을 배려하기 위한 조처다.
낯선 여행자들끼리 만나 펼치는 바비큐파티. '국내 게스트하우스의 본산'으로 불리는 제주도의 게스트하우스들에서 거의 매일 저녁 벌어지는 풍경이다. 참가자들이 회비(보통 1만~1만5천원)를 내 삼겹살·쇠고기·해산물·닭튀김 따위를 곁들여 막걸리나 맥주를 마시며 대화하는 자리다.
게스트하우스마다
개성있는 프로그램 마련
1~2주씩 머무는
게스트하우스 폐인도 양산
게스트하우스의 매력은 파티와 대화에만 있는 게 아니다. 특정 게스트하우스 자체가 가진 독특한 매력에 반해 잠자리로 정하는 이들도 많다. 지난 1일 아침, 서귀포시 대평리의 게스트하우스 티벳풍경. 제주 전통 돌담집을 티베트 테마의 숙소로 꾸민 소박한 게스트하우스다. 여행자 7~8명이 좁은 마루에 나란히 앉아, 빛바랜 타르초(오색기에 경구를 적어 바람에 내거는 티베트 불교경전)가 펄럭이는 가운데 부슬비 내리는 마당을 바라보고 있다. 차를 마시고, 늦은 아침식사(토스트)를 하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턱을 괴고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들이다. 비 때문에 여행 일정을 포기한 이들일까. 아니다.
"가족 같은 분위기 때문에"(노현동씨·22), "조용히 글 쓸 곳을 찾다가"(박선주씨·33) 1~2주일씩이나 죽치고 머물러 있는 이른바 '게스트하우스 폐인'들이다. 이미 서로 어느 정도 익숙해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이인 이들은 각자 "곧 떠날 수도 있고, 더 머물 수도 있는 자유로운 여행자들"이다. 직장에 사표를 내고 여행 왔다는 나상수(32)씨는 "이국적 분위기에 반해 2주일째 머물고 있다"고 했다.
게스트하우스의 분위기를 이끄는 건 주인장과 주인장을 돕는 스태프들이다. 티벳풍경 스태프 김진선(28)씨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한다"며 "티베트 명상음악을 틀거나, 갖가지 악기 연주로 분위기를 유도한다"고 했다. 소낭 게스트하우스 주인장 유씨는 "주인장은 여행자들이 서로 존중하며 편안하게 머물다 떠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이끄는 구실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특색있는 테마나 프로그램을 가진 게스트하우스들은 입소문을 타고 나홀로 여행길의 청춘남녀들을 불러모은다. 제주 서해안에선 해질녘에 모여 주인장의 안내로 해넘이 투어를, 동쪽에선 이른 새벽 주변 바닷가로 해돋이 투어를 나서는 곳이 많다. 철마다 야생화·억새·눈꽃 등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오름 탐방은 제주 게스트하우스들의 대표적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모은다. 바다낚시를 함께 나서거나 특정 악기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호텔 수준의 럭셔리 게스트하우스를 표방한 곳, 방송 프로 '짝'을 본떠 젊은 남녀 여행자끼리의 만남을 주선하는 곳도 있다.
게스트하우스에서의 만남은 여행모임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티벳풍경에서 만난 박선주씨는 "서울에서 수시로 번개모임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한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은 "여행길에 만나 연인 사이로 발전한 짝도 꽤 있다"고 귀띔했다. 민박집과 서구식 도미토리의 특성이 결합한 게스트하우스가 여행자들의 놀이터이자 소통의 공간, 새로운 모임의 공간으로 발전해가는 모양새다. 제주도에 살며 다양한 게스트하우스를 체험해온 여행작가 신영철(<게스트하우스 123> 공저자)씨는 "제주도의 경우 이미 포화상태라는 분석도 있지만, 개성적 분위기와 프로그램을 갖춘 게스트하우스는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젊은 올레꾼들이 잠만 자고 떠나는 저렴한 숙소로 생겨나기 시작한 게스트하우스는, 이제 제주도 곳곳에서 여행자들의 활력충전소 구실을 하며 제주 여행의 새로운 베이스캠프이자 여행 목적지로 자리잡아가는 모습이다.
제주=글·사진 이병학 기자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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