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날 영월이야기
코끝이 시린 겨울, 강원도 영월로 갔다. 영월은 따뜻하게 객을 맞았다. 그리움으로 물든 한적한 나룻터엔 안개가 내려앉아 이방인들을 감싸 안았다. 따끈한 곤드레밥, 올챙이국수 한 그릇엔 강원도의 정이 담뿍 담겼다.
강원도 하면 산 넘고 물 건너 가야 하는 장거리 여행지의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영월 땅은 사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다. 지리적으로는 충청도 제천과 맞대어 있다. 새벽녘 서울을 출발해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국도를 부지런히 달리면 2시간20분 만에 안개가 자욱한 영월의 아침을 만난다.
▲ 깎아지른 선돌 앞에 서면 눈이 저절로 감긴다
▲ 영화 <라디오스타> 촬영 후 건물 벽에 남겨진 추억. 두 주연배우 안성기와 박중훈
단종의 눈물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 강의 지류인 서강이 휘돌아 흐르는 곳에 섬 아닌 섬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으로는 육륙봉六六峰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다. 조선 6대 임금인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었던 곳, 청령포다. 워낙 지세가 험하고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단종은 이곳을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표현했다. 이 조그만 섬에는 여전히 다리가 놓여 있지 않다. ‘배를 탔다’ 싶으면 내려야 하는 거리. 단종이 그랬던 것처럼 그 유배길을 마음으로 느껴 보라는 영월군의 의도다. 물안개가 내려앉아 운치를 더하는 청령포. 단종어소로 향하는 길은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로 이어져 있다.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만이 남아 객을 반긴다. 단종이 기대 쉬었다는 수령 600년의 관음송(천연기념물 349호) 뒤로는 한양에 남겨진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쌓았다는 망향탑만이 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쓸쓸히 서 있다.
단종은 유배되었던 1457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해 청령포가 물에 잠기자 강 건너 영월부 객사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겼다. 그리고 그해 10월,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아 17살의 어린 나이에 숨진다.
청령포에서 서강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해발 320m 소나기재 정상에 도착한다. 38번 국도 ‘소나기재’는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오던 중 이 고갯마루에서 소나기에 흠뻑 젖었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이정표를 따라 100m쯤 걸어 들어가면 70m 높이의 거대한 기암괴석이 ㄱ자로 굽은 강줄기와 함께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선돌이다. 선돌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면 꼭 이뤄진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두 개의 바위가 우뚝 서 있어서 선돌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위쪽이 쪼개져 있을 뿐 선돌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의 바위다. 강 쪽에서 보면 바위뿌리가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원래 하나의 바위에 틈이 생겨 갈라진 것이다. 선돌 아래로 비치는 서강의 맑은 강물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소원을 묵묵히 들어냈을까. 선돌에 오면 누구나가 시인이 된다. 영화 <가을로>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라 그런지 젊은 사람들도 꽤 많이 찾는다.
청룡포┃주소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방절리 243-4 개장시간 연중무휴, 오전 9시~오후 6시(오후 5시까지 입장 가능) 입장료 어린이·청소년·군인 1,200원, 성인 2,000원 문의 청령포 안내소 033-370-2657 www.ywtour.com
선돌┃주소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방절리 산 112. 소나기재에 주차장이 있으며 이정표를 따라 50m 거리 입장료 무료
서부시장은 다 맛있다
영월 서부시장엔 동강순대나 일미강정식당, 뽕의 전설 등 이미 소문난 맛집이 많다. 서울에서 먹으면 ‘그 맛’이 안 나는 영월 음식을 먹고 싶을 땐 시장 안쪽으로 쭉 들어가자. 할머니와 이모님들이 칸막이 하나 사이에 일렬종대로 마주보고 앉았다. 서부시장 먹거리 장터. 메밀전병과 배추전을 부치는 냄새가 구수하다. 일명 총떡이라고도 불리는 메밀전병은 단돈 1,000원. 김치양념속을 가득 넣어 만든 메밀 반죽을 기름 두른 불판에 노릇노릇 구워낸다. 녹차가루를 함께 반죽해 만든 메밀전병 속엔 취나물이 가득하다. 싱싱한 배추 또는 묵은지로 부친 부침개 역시 뚝 잘라 간장에 꾹 찍어 먹는 그 맛이 아주 기가 막히다. 옥수수 반죽으로 만든 올챙이 국수는 또 어떻고. 숟가락을 쓰지 않고는 하루 종일 먹어도 다 못 먹는다는 묵국수는 한 그릇에 4,000원이다. 쭉 늘어선 집 가운데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골라 동강 막걸리와 메밀전병, 올챙이국수를 맛보자. 중간쯤 위치한 예진이네집 부침개와 전병은 온라인쇼핑몰을 통해 매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택배 배송되는데 포장을 위해 쌓아놓은 박스가 할머니 키를 훌쩍 넘는다. 동강막걸리와 함께 배부르게 한 끼를 먹어도 두 명이서 8,000원이면 충분하다. 후식으로는 영화 <라디오스타>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청록다방에서 커피를 한잔 하자. 2,000원, 착한 가격이다.
마차리 탄광촌의 추억
강원도의 관문도시 영월은 1970년대까지 탄광이 호황을 누리던 곳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이 모였다. 가진 것 없는 이들도 장화와 채굴 장비만 있으면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월은 탄광촌의 번성으로 1970년 인구가 12만3,000여 명에 달했으나 2000년대 들어서는 겨우 4만명선에 턱걸이하고 있다. 강원도탄광문화촌은 60~70년대 석탄산업의 중심지였던 북면 마차리의 탄광마을과 폐광의 옛 모습을 복원한 곳으로 60년대 마차탄광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탄광생활관에 들어서면 마차리 만물상회라 불렸던 마차상회가 자리하고 있다. 광부들이 막걸리를 들이키며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던 대폿집, 이발소와 함께 마차리 탄광촌으로 향하던 버스도 놓여 있다. 과거 영월 마차리 탄광촌 사람들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버스였다. 3교대 근무로 집과 탄광을 반복해서 오가는 광부들은 근무시간이 다가오면 버스정류장에 모여 탄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근무를 마치고 나오는 광부들은 지친 몸을 다시 버스에 맡겼다. 그 시절에는 탄광에서는 갑방(오전 8시~오후 4시 근무), 을방(오후 4시~자정 근무), 병방(자정~오전 8시 근무), 3교대로 1주일마다 바꿔서 근무를 했다.
이발관도 재밌다. 광부들의 머리는 대부분 짧았는데 머리가 길면 석탄가루를 쉽게 씻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60년대까지 개인집에서 이발을 해주는 곳이 있었지만 위생상태가 불량해 기계충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발관도 직번만 적어 주면 나중에 월급에서 공제됐다고 한다. 탄광체험관으로 들어가면 갱도를 뚫는 굴진, 발파작업과 탄광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운 동발, 막장 등을 볼 수 있다. 기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 활기 넘쳤던 탄광촌 거리의 모습은 아련한 향수를 자아낸다.
강원도탄광문화촌┃주소 강원도 영월군 북면 마차리 786-4 입장시간 11~2월 오전 10시~오후 5시, 3~10월 오전 10시~오후 6시 입장료 개인(어린이 1,000원, 청소년·군인 1,400원, 성인 2,000원), 단체(어린이 700원, 청소년·군인 1,000원, 성인 1,400원) 문의 033-372-1521
▲ 1 담백한 곤드레 밥 한 그릇엔 영월의 정이 듬뿍 담겼다 2 세월의 향기가 묻어나는 청록다방에서 커피 한잔 3 올챙이 국수, 메밀 전병에 동강막걸리 한 사발 4 서강에서 내려다보는 선암마을과 한반도 지형이 장관을 이룬다 5 옛 마차리 탄광촌 대폿집을 그대로 재현했다
서강이 만든 기적
선암마을을 끼고 도는 서강. 선암마을 맞은편으로는 한반도 전체를 옮겨놓은 듯 우리나라 지형을 쏙 빼닮은 곳이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은 한반도의 지형과 너무도 흡사해 감탄이 절로 난다. 입구 언덕길을 50m 오른 후부터는 비교적 완만한 구간으로 한반도 지형 전망대까지 쉽게 다녀올 수 있다. 왕복 1.6km에 약 50분 소요된다. 호젓한 기분으로 강가를 거닐고 싶다면 왕복 2.1km의 서강길을 걸어도 된다. 약 50분 걸리는데 송림이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약 600m 가량 올라가면 선암마을의 풍광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여름이면 전망대 부근에 핀 무궁화 꽃이 발 아래로 펼쳐져 한반도 지형과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선암마을┃주소 강원 영월군 한반도면 옹정리 산 180
글·사진 강혜원 기자 취재협조 참좋은여행 www.verygoodtour.com
글·사진 제공 : 트래비 (www.travi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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