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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의 아픔 간직한 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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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굴재사람 2012. 11. 10.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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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의 아픔 간직한 왕궁

 

 

[[머니위크]장태동의 여행일기/ 창덕궁 가을 이야기]

서울 도심 한 복판에 조선 왕실의 비밀 정원이 있다. 창덕궁 후원, 어느 숲의 가을보다 더 깊고 수려한 가을이 내려앉은 어느 정자에 앉으면 광해와 능양의 이야기도 정조의 굳은 마음도 다 들릴 것만 같다. 아주 오래된 숲 수백 번의 가을을 맞이하고 보낸 늙은 나무들이 옛날 이야기하듯 속삭일 것 같았다.

◆광해는 그날을 알고 있었을까?

1623년 3월13일 밤 창과 칼을 움켜 쥔 군사들이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앞에 모였다. 이들은 능양군(훗날 인조)을 따르는 무리들이었다.

궁궐 안에는 이미 능양군의 군대와 내통한 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돈화문을 열어주었다. 군사들이 밀물처럼 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왕과 신하들이 국정을 돌보던 선정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대조전 등 궁궐 안 대부분 건물은 화마에 휩싸였다.

왕은 그 무렵 궁궐에서 연회를 베풀며 밤까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능양군의 군대가 궁궐을 휩쓸고 다니는 사이 왕은 궁궐을 버리고 의관 안국신의 집으로 피해 있었다. 주인이 버리고 간 창덕궁은 이미 새로운 주인인 능양군의 손에 넘어갔다.

임진왜란 불탄 창덕궁을 다시 짓고 그 바탕 위에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왕은 그의 조카인 능양군에 의해 궁에서 쫓겨났다. 그가 바로 광해군이다.

사실 광해군은 능양군이 군사를 일으켜 자신을 왕의 자리에서 내몰려고 하는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 전에도 자신의 자리를 노린 여러 역모 사건이 있었고 이번 일도 사전에 미리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전에 그랬듯이 사전에 역모를 밝혀 관련된 자들을 처형하거나 유배 보내지 않았다. 역모 당일 밤이 되도록 궁궐에서 연회를 베풀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다만 생각하건대 광해군은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최후의 만찬을 즐겼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아니라면 정파 간 세력 싸움에서 무기력하게 희생된 것은 아닐까?

금전교 앞 느티나무

◆창덕궁, 광해의 꿈을 세우다

능양군은 조선 16대 왕, 인조가 됐다.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훗날 제주도로 또 다시 유배되기에 이른다.

선조 말기 광해군은 세자 시절부터 창덕궁을 다시 지으며 왕권 강화와 새로운 조선 건설을 다짐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됐다.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일을 맡았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전라도에서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아 진행했다.

그는 효자였다. 아버지 선조가 병으로 누워 있는 사이 광해군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 옆을 지켰다. 선조 또한 그런 광해군을 의지했는지 병이 위독해 지자 광해군을 불러 옆에 있게 했다.

그러던 중에도 광해군은 전쟁 때 불탄 창덕궁을 차근차근 다시 짓고 있었다. 선조의 병은 점점 악화되다가 결국 1608년에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이 왕에 오르면서 창덕궁도 새롭게 문을 열었고 조선의 정궁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사실 창덕궁은 1405년(태종5년)에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궐이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창덕궁 등이 소실됐으나 광해군은 창덕궁을 중건했다. 창덕궁은 조선의 5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중 가장 오랜 기간 왕들이 거쳐했던 곳이기도 하다.

광해군 집권 당시 외국 정세는 명나라의 국운이 쇠약해지면서 동시에 여진족(후금, 이후 청나라) 세력이 무섭게 일어났다. 명나라는 광해군에게 후금과 싸울 군대를 요청했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외교 전술의 지략을 펼치게 된다.

명나라에 1만 군대를 파견하는 이를 이끄는 장수에게 전투 도중 후금에 투항하라는 것이었다. 조선군대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명나라에게는 그 동안의 의리를 지키면서도 당시 최강이었던 후금의 조선 침략 계획을 화친으로 사전에 방지하려는 속셈이었다.

일은 광해군의 의도대로 진행됐다. 후금은 물론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와도 다시 국교를 정상화하고 무역의 길을 열고자 했다.

또한 광해군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국토를 재건하고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 잡는 일에 매진했다. 그 중 하나가 경기도 지역에 실시한 대동법이다.

대동법이란 그동안 중앙정부 및 지방관아로 납부하던 온갖 공물과 진상품, 납세품 등을 쌀로 통일한 것이다. 토지 1결에 일정량씩의 쌀을 징수했다. 그 쌀을 중앙정부와 지방관아에 배분해 필요한 물품을 민간 시장에서 사게 했다. 농민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환영했다. 경기도에서 시범 운영하던 대동법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능양군이 창덕궁을 장악하고 스스로 새 임금이 된 그 해까지 광해군이 왕으로 산 세월은 15년. 그 세월 동안 광해군의 새로운 조선 건설의 꿈을 함께 한 곳이 창덕궁이었다.

◆왕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거대한 회화나무 네그루가 서 있고 금천교 건너에도 몇 그루가 더 있다. 언뜻 보기에도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창덕궁 자료에 따르면 나무 수령을 300~400년 정도로 추정한다. 광해군이 재건한 창덕궁에 심은 어린 나무가 지금처럼 자랐을 수도 있는 일이다.

금천교를 건너 '왕에게 바른 말을 아뢰어 국정을 올바로 이끌어 간다'는 뜻이 깃든 진선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이 보인다.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위압적이면서도 자상한, 합리적인 자유, 그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인정전. 인정전부터 시작된 창덕궁 산책은 대조전, 희우루, 낙선재를 지나 비밀의 정원, 후원으로 이어진다.

창덕궁 후원은 왕실의 정원이었다. 왕의 휴식 공간이자 왕실의 행사를 열었던 곳이다. 또한 왕이 신하들을 격려하고자 술과 음식을 내고 함께 자리하기도 했다. 왕은 후원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정자나 건물을 지었는데 한때는 그 수가 100여 개나 됐다고 한다.

후원에서 처음 여행자를 맞이하는 것은 부용지와 주합루다. 약 300평 정도 되는 연못 주변에 몇 채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연못 바로 옆 작은 건물은 만개한 연꽃을 닮았다고 하는 부용정이다.

부용정 맞은편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건물이 주합루이다. 주합루는 아래로 부용지를 굽어보고 있으며 좌우로 서향각과 천석정 등의 건물을 거느렸다. 몇 개의 계단을 내려와서 정문인 어수문을 통과하면 부용지가 나온다. 주합루는 부용지 일대의 건물을 거느리고 풍경의 중심점이 된다.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은 왕만 드나들 수 있었다. 신하들은 그 옆에 있는 작은 문으로 드나들었는데 머리를 숙이지 않고서는 출입할 수 없는 구조다. 아마도 왕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주합루는 정조가 즉위한 그 해에 완공됐다. 정조는 붕당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죽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을 품은 군주다. 붕당의 정치싸움에 흔들리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를 혁신하려는 정조의 뜻이 담긴 곳이 주합루였다.

주합루에는 왕실 도서관이었던 규장각이 있었다. 규장각은 세조 때 잠깐 설립됐다가 폐지 된 적이 있었는데 정조는 즉위년에 규장각을 설치했다. 규장각은 궁궐 안팎 여러 곳에 설치 됐으며 주합루에는 어필과 인장, 도서 등을 보관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기능이었다. 정조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인재가 필요했고 규장각을 통해 유능한 인재를 발굴 육성했다. 그들이 정조의 친위세력이 됐던 것이다.

◆하늘의 달은 오직 하나다

정치 혁신과 왕권 강화를 위한 정조의 '촌철살인'은 존덕정 정자에 남아 있다. 존덕정은 애련지를 지나면 나온다.

애련지는 숙종이 좋아했던 곳이다. 연못 주변 단풍이 다른 곳보다 진하게 들었다. 돌담과 기와 정자와 연못이 단풍과 어울렸다. 연꽃을 좋아했던 숙종은 연못 옆 정자에 '애련정'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애련지를 지나면 정조의 글귀가 남아 있는 존덕정이 나온다. 존덕정은 인조 때 지어졌다. 정조는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호를 짓고 그 서문을 새겨 존덕정에 걸었다. 그 뜻은 '세상 모든 냇물이 품고 있는 밝은 달'로 해석할 수 있는 데 그 속에는 '하늘에 달은 하나이되 그 달이 비치는 세상의 모든 냇물에도 하나 씩 달이 있으니 왕의 마음이 천하에 닿아 있는 것과 같다. 이렇듯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는 데 신하들도 왕의 뜻을 따라 그 일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세상 모든 개울이 달빛을 받아 빛나지만 하늘의 달은 오직 나 하나다. 따라서 신하들은 내 뜻을 거역하지 않고 따르는 것이 합당하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옥류천 풍경. 사람 손으로 바위를 깨고 쪼아 저런 물길을 만들었다. 저기에 술잔을 띄우고 와과 신하들은 술잔을 나누었다.

◆후원의 깊은 곳, 옥류천

존덕정을 지나 옥류천으로 향한다. 숲이 울창하다. 도심 한 복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런 숲 깊은 곳에 있는 옥류천 일원은 후원에서도 숨은 정원이다.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바위와 나무가 풍경을 이루는 그곳에 태극정, 취한정, 농산정, 청의정, 소요정 등 다섯 개의 정자와 건물이 들어섰다.

그 중 소요정과 그 앞 소요암이 눈에 들어온다. 소요암 너럭바위 위에 인공으로 파 놓은 작은 물길이 있다. 지금도 그 물길로 물이 흐른다. 이곳은 왕이 신하들과 함께 물에 술잔을 띄우고 즐겼던 곳이다. 곡선을 그리며 굽어 돌아가는 물길 한 쪽 바위에는 인조의 필체인 '옥류천'이란 글씨와 숙종의 시가 새겨있다.

비밀의 숲, 후원. 그 안에 숨은 정원 옥류천 정자에 앉으면 가을이 가을답다. 깊어가는 가을 속에서 다시 일상으로 걸어 나간다.

애련지의 단풍을 한 번 더 보고 계단을 올라서서 길을 따르니 구 선원전과 창덕궁 돌담 사잇길이 나온다.

지난 몇 시간 후원 산책의 여운을 품고 걷는 데 늙은 나무 한 그루가 쇠파이프 지지대의 부축을 받고 서 있다. 750년 된 향나무다. 창덕궁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그곳에 있던 나무다. 한 아름도 넘는 밑동이 흙을 완강하게 움켜쥐고 있다. 나뭇잎이 푸르다.

[여행정보]

< 길안내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에서 약 350m 거리. 지하철 1, 3, 5호선 종로3가역에서 약 600~700m 거리.

시내버스 창덕궁 정류장 하차 후 약 180m 안팎 거리. 109, 151, 162, 171, 172, 272, 7025번 버스.

< 숙박 >

서울 시내 숙박시설 이용.

< 음식 >

창덕궁 돈화문에서 약 800m 거리 낙원상가 주변 아구·해물찜 골목. 종로3가역 6번 출구 부근 골목길 안에 멸치칼국수집과 해물칼국수집이 있다.

< 관람안내 >

창덕궁 입장료 3000원. 후원 입장료 5000원. 후원은 입장 시간과 인원수가 제한돼 있다.(매주 월요일은 쉰다) 관람시간은 3~5월과 9~11월은 오전 9시~오후 6시, 6~8월은 오전 9시~오후 6시30분, 12월~2월은 오전 9시~오후 5시30분. 매표 및 입장 시간은 관람 마감 시간 1시간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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