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속도를 버리고 나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천천히 살자. 최근 내가 세운 원칙이다. 일을 하면서 천천히 살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출근 않고 쉬는 토요일을 ‘슬로 데이(Slow Day)’로 정했다. 몇 가지 규칙도 마련했다. 룰에 얽매이는 것 자체가 느린 삶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래도 최소한의 규칙은 필요하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운전하지 않기, 인터넷 안 하기, TV 안 보기, 하루 두 끼만 먹기…. 굳이 규칙이랄 것도 없는 사소한 것들이지만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
무엇보다 달라진 건 많이 걷는다는 점이다. 멀리 갈 경우에는 버스를 이용하지만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닌다. 마트나 음식점, 영화관에 갈 때 전에는 으레 차를 몰고 갔지만 지금은 도보로 간다. 걷다 보니 반경도 점점 넓어진다. 내가 사는 경기도 일산 신도시에서 6~7㎞ 떨어진 파주 심학산 둘레길까지 걸어서 간 적도 있다. 산길을 포함해 꼬박 5시간 가까이 걸었다.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는 새로운 경험도 하고 있다. 목적지를 정하면 그곳까지 최대한 빨리 가는 것이 지금까지의 내 라이프스타일이었다. 액셀을 밟아 속도를 내다 보니 주변에 신경 쓸 여유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지금은 못 보고 지나쳤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길가의 꽃, 들판, 농가, 학교, 야산, 무덤 하나하나가 시각과 후각, 청각을 자극하며 소중하게 다가온다.
얼마 전 슬로 데이에 영주 부석사에 다녀왔다. 옛날 같았으면 당연히 승용차를 몰고 속도와 한바탕 씨름을 했겠지만 이번에는 노선버스를 이용했다. 느긋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음악을 듣고, 귤을 까먹고, 책을 볼 수 있는 여유가 너무 좋았다. 부석사도 좋았지만 그곳까지 오고 가는 과정도 좋았다. 목표 지향적 여행이 경로 지향적 여행으로 바뀌었다고 할까. 속도를 버리는 대신 새로운 것들을 얻었다.
실크로드 1만2000㎞를 4년 동안 걸어서 횡단한 프랑스인 베르나르 올리비에(74)씨가 한국에 왔다.<본지 10월 31일자 30면> 올레길이 있는 제주도에서 열린 ‘2012 월드 트레일 콘퍼런스’ 참석차 방한했다고 한다. “걷기는 두 발을 움직이는 물리적 행동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정신적 행동”이라는 그의 말이 재미있다. 한국에서 걷기가 유행인 것은 한국 사회가 성찰이 필요한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전국 각지의 크고 작은 산마다 둘레길이 넘쳐나고 있다. 걷기가 열풍은 열풍인 모양이다.
약간 두꺼운 양말과 발에 딱 맞는 운동화를 신고, 탄력 있게 타박타박 걷는 기분이 정말 좋다. 일주일에 세 번 이상, 한 번에 30분 이상 걸으면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한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천천히 살기로 한 것은 모처럼 내가 내린 잘한 결정이다. 앗싸, 오늘은 토요일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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