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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북극성' 터에 자장율사가 세운 통도사 자장암

라이프(life)/풍수지리

by 굴재사람 2012. 11. 2.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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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북극성' 터에 자장율사가 세운 통도사 자장암

  • 글= 조용헌 동양학박사 칼럼니스트

 

 

삼보(三寶) 사찰이라 하면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순천 송광사를 가리킨다. 불보(佛寶)는 통도사이고, 법보(法寶)는 해인사, 승보(僧寶)는 송광사이다. 세 군데 모두 한국에서 규모가 큰 사찰에 해당한다. 이런 이야기는 책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므로, 책만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정보이다. 책에 없는 이야기를 해야 독자가 즐겁다. 여기서부터는 필자의 느낌과 체험이다.

해인사는 절의 느낌이 속세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맑고 깨끗한 기운이 있다. 내륙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 옛날 같으면 깊은 산속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런 느낌도 들고, 가야산이 1,000m가 넘는 날카로운 바위산이기 때문이다. 가야산은 오행으로 보면 화체(火體)의 산이다. 불꽃이 이글거린다. 정신이 번쩍 나는 산이다. 반대로 송광사는 아주 부드럽다. 넉넉하고 편안한 감을 주는 절이다. 조계산이 흙이 많이 덮여 있는 육산이라서 산세가 부드럽다. 그래서 나온 우스갯소리가 ‘해인사에서 3년 살면 주먹이 되고, 송광사에서 3년 살면 새색시가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주먹이 된다는 것은 돌산인 가야산의 정기를 받으면 그만큼 강건한 기운으로 충만해진다는 말이다. 강건한 기운이 있어야 화두를 뚫을 것 아닌가! 송광사는 새색시처럼 유순한 기운이므로 포용하는 덕이 있다. 포용이 어디 쉬운가?


▲ 영남알프스 7개 봉우리가 북두칠성이고, 그중 북극성에 해당하는 영축산 중심에 자장암이 자리 잡고 있다.
문제는 통도사이다. 필자가 보기에 통도사는 해인사와 송광사를 합쳐 놓은 것 같은 분위기이다. 뒷산인 영축산(靈鷲山)이 1,000m가 넘는 높은 바위산이다. 낮은 산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이 영축산이 병풍처럼 통도사를 한 바퀴 둘러싸고 있다. 날카롭게 솟아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대나무 소쿠리처럼 사찰을 둘러싸고 있는 점이 묘미이다. 바위산의 강건함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소쿠리처럼 포용하는 형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강건함과 폭넓은 포용력을 두루 갖추고 있는 산이 영축산이고, 통도사의 가풍이지 않나 싶다.

영축산은 그 이름대로 풀어보면 신령스런 독수리를 가리킨다. 독수리 ‘취’(鷲)자를 쓴다. 때로는 ‘취’를 ‘축’이라고도 발음한다. 산이나 지명 가운데 조류과의 이름이 4종류가 있다. 닭, 기러기, 봉황, 독수리이다. 닭 이름이 들어가는 명당은 금계포란(金鷄抱卵)이 있다. 경북 풍기(豊基)에 가면 금계포란 자리가 있다고 전해진다. 금닭이 알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산의 모습은 둥그런 봉우리가 하나 솟아 있는 형국이다. 둥그런 봉우리는 닭의 머리로 본다. 봉황이 들어가는 지명은 둥그런 봉우리인데, 닭머리보다는 그 봉우리 크기가 더 큰 경우이다.

진주에 가면 시내 남쪽에 대봉산(大鳳山)이 있다. 기러기는 닭보다 더 작은 봉우리가 가운데에 하나 있고, 그 좌우 옆으로 2~3개쯤 둥그런 봉우리들이 포진해 있는 형국을 가리킨다. 평사낙안(平沙落雁)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지는 전북의 칠보면에 가 보면 이런 산 모습이 보인다. 독수리는 기러기보다 봉우리의 사이즈가 더 큰 경우이다. 기러기보다 큰 형국을 독수리로 보는데, 영축산이 바로 그런 형국이다.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모습으로 보았기 때문에 옛날 어른들이 독수리 축(鷲)자를 써서 영축산이라고 이름 붙였지 않나 싶다. 물론 인도에 가면 영취산이라는 이름이 있다. 이름 자체는 인도의 영취산에서 유래했겠지만 풍수의 물형론(物形論)으로 볼 때도 이 산은 독수리 같다.


울주칠봉은 북두칠성, 그게 영남알프스

영축산은 영남알프스 가운데 하나다. 어떤 이는 영남알프스의 7개 산을 가리켜 ‘울주칠봉’(蔚州七峰)이라고도 부른다. 1,000m급의 고산이 연달아 포진해 있는 이 7개의 봉우리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언젠가 경주의 어떤 도사를 만나 경주의 지세를 놓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도사는 신라통일 이후에도 수도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둔 이유는 경주가 북극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극성이 옮기는 것 봤냐?” “그렇다면 북두칠성은 어디 있냐?”고 필자가 물었더니 “영남알프스 7개 봉우리가 그 칠성이다”는 대답을 했다. 일리가 있다. 북극성에 해당하는 경주를 싸고 있는 7개의 칠성이 바로 영남알프스라는 이야기다.

영축산은 그 7개 봉우리 가운데서도 중요한 위치이다. 북두칠성의 제일 첫 번째 별 이름이 추성(樞星)이고, 두 번째 별이름이 기성(機星)이다. 추성은 국자 모양의 제일 앞부분이다. 칠성이 매일 한 바퀴씩 하늘에서 회전하는데, 이 추성이 가운데 중심이 된다. 영축산은 추성으로 볼 수 있다. 약간 과대 포장하자면 영남알프스 7개 봉우리의 중심이 영축산이다.

▲ 자장암의 돌계단 위로 올라가면 마치 용이 승천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통도사는 왜 이름이 통도사인가? ‘통만법(通萬法) 도중생(度重生)’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만법을 통해서 도를 깨달은 다음에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그런지 통도사는 우리나라 불교사찰의 종가라고 부른다. 불지종가(佛之宗家)인 것이다. 통도사 경내에는 본사 외에도 12~13개의 암자가 있다. 이 암자 하나 하나의 크기도 어지간한 사찰의 규모에 해당한다. 대찰이다. 통도사는 한국에서 가장 큰 절이다. 억불정책의 조선시대에 통도사는 유자들로부터 집중적으로 견제를 받았다고 한다. 견제는 종이와 차를 왕실에 바치라는 공출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통도사 승려들이 종이 만들고, 찻잎 따서 차를 만들어 올리느라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생했다. 하도 징글징글해서 경내에 있는 차나무와 종이 만드는 닥나무를 모두 갈아엎어 버렸다고 전해진다.

‘불지종가’인 통도사를 처음 개창한 인물은 자장율사(慈藏律師)이다. 그는 원효보다 한 세대 위이다. 원효 선배세대라고 보아야 한다. 통도사와 그리고 통도사 내에 있는 암자인 자장암은 그의 안목으로 잡은 터이다. 터를 보면 안목의 정도를 안다. 자장암은 어떤 터인가. 자장율사는 636년에 중국으로 유학을 갔고, 643년에 신라에 귀국했으니까 자장암은 643년 이후에 세워진 암자로 추정된다. 이미 그는 당나라의 정신적 지주였던 종남산(終南山)을 비롯해 여러 유명 사찰들을 둘러보고 난 다음이었으므로 안목이 국제화된 상태였을 것이다. 그리고 수도를 해서 몸의 기경팔맥(奇經八脈)이 열리고, 정신세계가 확장되면 산세를 보는 안목이 범인과는 다르게 된다. 반경 30리 안에서 일어나는 산천의 기운작용을 감지하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눈앞의 산봉우리만 보지만, 인천안목(人天眼目)을 갖춘 도인은 주변 30리까지 그 산천의 기운이 뻗치는 모습을 보는 법이다. 통도사를 건립하기 전에 자장율사는 처음 이 자장암 터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현재 자장암에서 보면 영축산이 빙 둘러싸고 있다. 자장암 정면에도 산이 둘러싸고 있다. 트여 있지 않다는 말이다. 자장율사보다 한참 뒤인 9세기 무렵의 도선국사가 잡은 터도 앞이 트여 있지 않다. 앞이 적당한 높이의 산으로 막혀 있는 곳을 도선국사도 선호했는데, 자장암도 보면 이와 같다. 앞이 가로막혀 있지 않고 터지면 기운이 빠지는 것으로 본 듯하다. 앞이 적당한 높이의 산으로 잘 막혀 있는 곳을 ‘관쇄’(關鎖)가 잘 되었다고 한다. 도선국사가 말년에 주석한 광양 백운산 자락의 옥룡사(玉龍寺) 터도 관쇄가 잘 되어 있고, 속리산의 복천암(福泉庵)도 관쇄가 잘 되어 있는 암자 터로 기억된다. 관쇄가 잘 되어 있으면 기운이 빠지지 않고 저장되는 작용을 한다. 공부가 완전히 끝난 고단자에게는 암자 터의 관쇄 여부와 상관없지만, 일반적으로는 관쇄가 잘 된 곳이 무난하고 좋은 것이다.

▲ 법당을 지을 때도 바위를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지은 자장암. 암자 바로 앞에 마애석불이 있다.
북극성 영축산이 자장암 둘러싸고 있어

앞산이 너무 높으면 답답한 느낌을 준다. 감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앞산이 너무 높아도 기피한다. 적당한 높이가 좋다. 마루에 서서 눈으로 쳐다보았을 때 눈높이 정도의 산 높이가 좋다. 자장암 터는 영축산이 용(龍)처럼 한 바퀴 휙 둘렀다가 다시 그 시작 부분을 되돌아보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를 회룡고조(回龍顧祖)라고도 한다. 용이 고개를 돌려 자기가 출발했던 지점의 조산(祖山)을 쳐다본다는 의미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영축산은 독수리가 아니라 한 마리 커다란 용(龍)으로 볼 수 있다. 용의 품안에 통도사와 열두세 개의 암자가 둥지를 틀고 있는 셈이다.

거시적인 국세가 이렇다면 미시적인 지점도 살펴보아야 한다. 자장암에는 바위가 돌출되어 있다. 현재 법당 마루에 바위가 돌출되어 있는데, 이는 거북이의 꼬리에 해당하는 바위라 한다. 법당을 지을 때도 일부러 이 바위를 제거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살려두고 지었던 것이다. 법당은 거북바위의 몸통에 눌러 앉아 있는 형국이다. 거북이 머리는 법당 뒤로 나와 있다고 본다.

그런가 하면 법당 뒤에는 호랑이 바위도 있다. 자장암에 전해지는 옛날 스님들의 유촉
(遺囑)에 의하면 법당을 혹시 개축할 때에도 법당 뒤의 호랑이바위를 상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왜 그런 부탁을 특별히 남겼을까? 바위에서 나오는 기운 때문이다. 바위를 제거하면 땅에 흐르는 에너지 흐름에 이상이 온다. 이상이 온다는 것은 맥이 빠진다는 의미이다. 맥이 빠지면 도인이 안 나온다. 그래서 법당을 지을 때도 거동하기에 불편은 하겠지만 바위를 함부로 건들지 말라고 당부를 남겼다고 보인다. 땅의 기운을 감지하지 못하고, 이런 유촉을 그저 전설의 고향으로만 받아들이는 요즘 사람들은 이해가 잘 안 가는 대목일 것이다.

그 옛날 자장율사가 처음 거처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지점이 현재 자장암 암주(庵主) 스님의 거처이다. 필자도 작년에 차를 한잔 마시느라고 이 거처에 몇 시간 머물렀던 적이 있다. 차를 마시면서 몇 시간 이야기를 해도 피곤이 잘 느껴지지 않는 자리였다. 엉덩이 부근에서 기가 들어오더니만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기미가 느껴졌다. 이런 자리에서 글을 쓰면 오랜 시간 작업해도 피곤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파트와 이런 명당 터는 확실하게 기운이 다르다.

▲ 양산 통도사엔 13개의 암자가 있다. 이 암자들이 다른 절 같으면 독립 절에 해당할 정도로 크다.

자장율사가 용을 제압하고 절 창건

자장암에는 금와보살 이야기가 있다. 금개구리가 산다는 것이다. 법당 뒤의 바위에는 어른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한 크기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 바위 구멍 속에 금개구리가 산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손가락으로 바위에 구멍을 뚫었고, 그 뒤로부터 금개구리가 이 구멍에서 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자장암 방문객들은 이 금개구리를 보려고 몇 시간씩 그 바위 앞에서 기다리기도 한다. 가끔 그 개구리가 나타나기도 하면 사람들은 금와보살을 보았다고 좋아한다.

필자는 2011년 가을에 자장 암주 스님의 배려로 3일간 스님 처소 옆에서 머물렀던 적이 있다. 약 1,400년 전에 자장율사가 공부했던 그 터에서 잠을 자 본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유리창문 앞으로 200~300년은 되었을 성 싶은 적송들이 암자 터를 둘러싸고 있다. 높고 장엄하면서도 매우 점잖은 영축산이 둘러싸고 있어서 자동차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는 곳이다. 경치가 아무리 좋아도 자동차 소음이 들리면 별로다. 그곳에 바위맥이 내려와 터를 받치고 있는데, 금상첨화로 노송들 수십 그루가 터를 호위하고 있는 형국이다. 바람이 불면 저 앞산의 녹색 숲들이 흔들리고, 창문 앞의 낙락장송의 가지가 흔들거린다. 푸른 하늘과 청산과 바위와 소나무가 어울린 궁합이다. 게다가 신라불교의 틀을 정립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자장율사가 머물렀다는 역사적인 암자 아닌가. 한국에서 1,400년의 역사를 지닌 건축지(趾)가 불교 절 말고는 어디에 있겠는가.

몇 년 전에 프랑스의 권위지인 <르몽드> 사장 부부가 자장암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자장암의 이러한 풍광을 보더니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라고 찬사를 보내면서, “다음에 한 번 다시 올 테니까 그때는 꼭 하룻밤만 재워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한국 사람이 프랑스에 가서 1,0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수도원의 특별한 방에 잠 좀 재워 달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재워 줄까? 아마 안 재워 줄 것이다.

자장율사는 중국에 가서 여러 명산을 참배했다. 중국의 청량산에 가서 기도했더니 문수보살이 나타나 가사 1벌과 사리 100과(果)를 주었다. “이걸 가지고 너희 나라에 가라. 너희 나라에 독룡(毒龍)이 사는 영취서산(靈鷲栖山)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고 거기에 가사와 사리를 봉안하거라. 그러면 부처님의 진리가 오래 머물며 하늘의 용이 그곳을 보호하리라”는 가피(加被)를 받았다. 그 가피를 받고 자장율사가 세운 절이 오늘날 통도사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통도사 금강계단 앞의 법당 옆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독룡이 살던 터 임을 암시해 주는 연못이다. 통도사 터는 원래 용이 살던 연못과 늪지대였고, 자장율사가 돌아와 그 용들을 제압해 절을 세운 것이다. 통도사의 출발점이 바로 자장암이었다고 보면 된다. 자장암은 자장율사의 스케일과 안목을 읽을 수 있는 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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