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약산(藥山, 745~828) 선사는 어릴 적부터 경전을 익혔죠.
그러나 나중에는 문자를 버리고 선문(禪門)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죠.
깨친 후에도 약산선사는 『법화경』 『열반경』 『화엄경』 등의 경전을 늘 곁에 두고 읽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경전을 펼치고 있으면 불호령이 떨어졌죠.
“경전의 노예가 된다. 경전을 읽지 말라”고 말이죠.
이를 참다 못한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스님. 저희에겐 경전을 덮으라 하시면서, 스님은 왜 날마다 경전을 보십니까?”
이에 약산선사가 대답했죠.
“나는 경전을 눈 앞에만 놓았을 뿐이다.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느니라.”
그러자 제자가 ‘옳거니’하면서 말했습니다.
“저희도 경을 눈 앞에만 두고 읽지 않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약산선사는 무표정하게 제자를 쳐다봤죠.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밖을 보며 말했죠.
“나는 눈 앞에만 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너희가 경전을 눈 앞에 놓을 때 문자가 너희를 보지 않느냐.
그걸 어찌 막으려 하느냐.”
언뜻 들으면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이란 얘기네요. 그러나 선의 세계는 냉혹하고, 정확합니다. “어버버”하며 넘어가는 두리뭉실한 세계가 아니죠. 한 마디만 던져도 ‘내가 선 자리’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이니까요.
그럼 약산선사와 제자들의 차이는 뭘까요. 바로 ‘나의 유무’죠. 약산선사는 이미 ‘나’가 허상임을 본 거죠. 그래서 그에겐 경전을 보는 ‘나’가 없는 겁니다. 경전을 보고, 비교하고, 풀이하는 ‘나’를 여읜 거죠. 그러니 마당에 있는 소나무, 하늘을 나는 새처럼, 경전도 그냥 눈 앞에 놓기만 할 뿐이죠. 그 외에 달리 무얼 할 수 있을 까요.
그러나 제자들은 딴 판입니다. 경전을 보는 ‘나’가 엄연히 존재하죠. 경전을 재고, 평하고, 따지는 ‘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희도 경전을 눈 앞에만 놓고 읽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이 무의미한 거죠. 그걸 약산선사가 안 겁니다. 그래서 꼬집은 거죠. ‘네가 경전을 보지 않아도, 경전이 너를 보지 않느냐’라고 말이죠. 제자들에게 ‘나’가 없다면 경전도 제자를 못 보겠죠.
산중의 큰스님들은 종종 “선과 악, 양변을 여의라”고 하십니다. 대체 ‘양변’이 어딜까요. 이 일화에도 양변이 있습니다. ‘나’와 ‘경전’, 그게 바로 양변이죠. 그래서 한쪽 변인 ‘나’를 여의면, 다른 쪽 변인 ‘경전’은 절로 여의게 됩니다. 줄다리기는 한쪽만 줄을 놓아도 당겨지질 않습니다. 그때는 수천 번, 수만 번 경전을 봐도 ‘경전의 노예’가 되지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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