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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과 선암사

라이프(life)/레져

by 굴재사람 2012. 5. 3.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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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푸른광장-정미경

순천만과 선암사

 

 

잔설 위에 또닥또닥 떨어져 봄을 일깨우는 빗소리를 들으며 설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봄이 농익었다. 시절을 따라 매화와 벚꽃, 배꽃이 차례로 피었다 지고 연둣빛 이파리들이 고물고물 얼굴을 키운다. 사람으로 치자면 봄은 아무래도 여자다. 그러나 막 사춘기를 지나는 수줍은 소녀가 아니라 팜파탈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화려한 색채와 유혹적인 향기로 마음을 들뜨게 하고 간지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옷을 벗게 하고는, 끝내 신열과 몸살과 떨어지지 않는 기침을 안겨주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한 보름, 온 우주가 내 몸을 간질이는 듯한 시간이 지나면 봄은 어느새 저만치 달아나 있는 것이다. 봄이 더욱 애틋한 것은 어쩌면 이 짧음 때문이기도 하겠고, 희망 없이 우중충한 우리네 마음의 풍경과 너무도 다른 환함 때문이기도 하겠다.

스치듯 짧은 봄이 아쉬운 사람들은 그래서 남도로 길을 나선다. 봄날의 여행은 시간의 터널을 통과하는 여행이다. 남쪽 바닷가로 내려가 설레는 봄의 훈풍(薰風)과 꽃향기에 흠뻑 젖었다 돌아오면 그 사이 부지런히 달려온 봄과 다시 만나게 된다. 올해는 매화도, 벚꽃도 그렇게 두 번씩 만났다. 봄을 만나러 갔다 해서 봄만 만나고 돌아오는 건 아니다. 실제 여행이 다큐멘터리 프로그램과 다른 것은 예상치 못한 것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봄의 순천을 찾아갔는데 전남 순천은 봄에 더하여 소중하고 귀한 것들을 일깨워주었다. 돌도끼를 찾으러 간 나무꾼에게 은도끼와 금도끼까지 안겨준 산신령처럼.

순천으로 달려갈 때는 사실 순천만(灣)을 마음에 두었었다. 순천만은 비상하는 자태(姿態)가 우아한 흑두루미의 도래지이며 세계 5대 연안습지 중의 하나로 알려졌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순천은, 순천이 아닌 무진이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의 배경인 무진은 현실의 지도에는 없는 장소지만, 문학청년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겐 성지(聖地)와도 같은 곳이다. 짙은 안개처럼 자욱한 허무와 고독의 느낌으로 소설 속 풍경이 되는 갈대밭과 순천만은 자연스레 겹쳐진다.

나지막한 언덕에 올라 내려다보는 갈대밭은, 대단히 아름다웠다. 작은 섬처럼 둥글거나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 사이로 봄빛에 뒤채는 물결이 잔잔히 퍼져나갔다. 다정한 새들의 울음소리와 갈대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무진기행’이 사람이 쓴 명작(名作)이라면, 순천만은 자연과 시간이 빚은 예술이었다.

조계산 자락에 있는 선암사는 1500년 세월을 품고 있는 고졸(古拙)한 절이다. 고맙게도 긴 시간의 더께를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화려한 덧칠을 하지 않은 단청(丹靑)은 빛바랜 채로 소박하고 은은하다. 뒤뜰엔 수령이 600년쯤 되는 늙은 매화의 자태가 황홀하고, 절 마당엔 기막히게 잘생긴 소나무가 우아하게 누워서 자라고 있었다. 고즈넉한 풍경만으로도 오욕과 번뇌를 씻어낼 만한데 이 절의 백미(白眉)는 해우소(解憂所)였다. 2층 누각에 있는 해우소라니. 어디 구석진 곳이 아니라 대웅전과 전경 사이, 햇살과 솔바람이 어우러지는 곳에 앉은 해우소는 맞배지붕 아래 목조구조물이 정갈했다. 그곳에서 나는 뜻밖에 그 시를 만났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정호승)

시를 천천히 두 번 읽고서야 알았다. 나는 봄을 찾아 거기까지 간 것이 아니었다. 그 시를 읽다보니, 내 안에 울고 싶은 누군가 있다는 걸, 웃고 있는 옆 사람도 차마 말못할 울음의 사연을 안고 있다는 걸,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은 밝게 터뜨리는 웃음이 아니라 한바탕 쏟아낸 눈물의 밑바닥에 샘물처럼 새로 고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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