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가오리찜과 돼지 족탕이 막걸리 부르는 南道 주막

라이프(life)/레져

by 굴재사람 2012. 5. 3. 21:33

본문

[오태진의 길 위에서] 가오리찜과 돼지 족탕이 막걸리 부르는 南道 주막

 

 

봉동길은 전남 구례군 구례읍을 동서로 가로지른다. 반듯한 건물과 상가가 늘어선 중심 도로다. 그 길 중간, 읍 시가지 복판에 70년 넘은 누옥(陋屋)이 거짓말처럼 끼여 있다. 잿빛 슬레이트 지붕이 주저앉을 듯 낮다. 지붕 앞에 주름 잡힌 함석판으로 간판을 세웠다. '동아식당'이라고 쓴 검정 페인트도 빛이 바랬다.

미닫이 유리문엔 차리는 음식을 써놓았다. 가오리찜, 돼지주물럭, 두부김치…. 술꾼 아니라도 막걸리를 떠올릴 안주들이다. 토요일 낮 두시, 어둑한 실내에 탁자 다섯이 벽 따라 놓여 있다. 동네 사람으로 보이는 사내 둘이 막걸리 잔을 기울인다.

일행 넷이 안쪽 자리에 앉았다. 아내들은 엉거주춤 '뭐 이런 데가 있나' 하는 표정이다. 늦은 아침을 든 지 얼마 안 돼서 가오리찜 하나만 시켰다. 여주인이 뒤꼍에서 하루 이틀 말린 가오리를 들고 와 솥에 넣는다.

가오리가 익는 사이 찬이 깔렸다. 씻어서 볶은 묵은 김치, 매콤한 파김치, 콩자반, 멸치볶음, 콩나물무침까지 하나같이 소박 친근한 집 반찬이다. 무말랭이에선 햇빛 좋은 마당에 펼쳐놓고 뒤적여 말리던 그 냄새가 난다. 요즘 음식점 무말랭이는 물엿 범벅이어서 젓가락이 안 가는데, 이건 고소하고 쫄깃한 게 제맛이다.

국은 멸치국물에 무를 큼직큼직 썰어 넣고 고춧가루에 소금 간을 해 끓였다. 반으로 갈라 내장 뺀 국물 멸치가 들어 있는 것도 어릴 적 밥상 그대로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딸가닥 딸가닥 수저 소리 내던 따스한 시간들이 떠오른다. 무엇보다 접시 가득 담긴 달걀 프라이가 눈길을 잡아끈다. 달걀 다섯 개를 한꺼번에 부치고 다진 부추와 고추를 올렸다. 시골 식당 후한 인심이 덩달아 얹혔다.

신바람 난 일행이 "돼지주물럭도 맛있을 것 같다"며 주문했다. 여주인이 "일단 드셔 보고 시키라"고 말린다. 작은 솥뚜껑만한 가오리찜이 나왔다. 파·당근·고추를 고명으로 얹고 접시 가장자리를 빙 둘러가며 곱게 썬 부추를 수북이 쌓았다. 야들야들한 살점, 오돌오돌한 물렁뼈 몇 젓가락에 막걸리 주전자가 금세 동난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이젠 시골 양조장도 생막걸리를 빚지만 왜 다들 사이다처럼 달큰하고 톡 쏘는지 모르겠다. 이런 집, 이런 술상엔 시금털털한 막걸리가 제격인데. 가오리 접시가 비어가자 생두부를 갖다 준다. 따로 값을 받아도 될 양(量)이어서 절반 가까이 남겼다. 돼지주물럭까지 시켰으면 배불러 감당 못했을 것이다. 그걸 내다보고 제지한 여주인을 새삼 다시 봤다. 장삿속에 앞서 손님을 생각하는 시골 주모(酒母)를 정말 '이모'라 부르고 싶어졌다.

예순 넘은 여주인은 말수가 적고 말도 짤막해서 처음엔 퉁명스러워 보였다. 자리가 끝나갈 무렵, 행색 초라한 남자가 들어와 말없이 문간 자리에 앉았다. 주인도 아무 말 없이 막걸리 한 통과 반찬 몇 가지를 갖다줬다. 그러고는 들릴락말락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 통만 마셔." 술을 따라 마시는 남자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술병이 깊은 듯했다. 남자는 주인이 이른대로 반 통만 마시더니 또 말없이 나갔다. 주인은 돈 받을 생각도 안 했다. 동네 사람이 다 가족 같은 시골 주막 아니면 볼 수 없을 장면이었다.

어느 미식가도 이 집에서 비슷한 광경을 보고 글로 써 올렸다. 역시 차림이 남루한 남자가 술을 마신 뒤 여주인 앞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돈이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다른 손님 들을세라 여주인이 조용히 말했다. "잉, 그냥 가아."

여주인은 부부가 농사를 짓다 이 집에서 장사한 지 10년 됐다고 했다. 언니 동생 하며 지내던 앞 여주인이 그만두면서 이어받았다. 집주인이 왜 건물을 손보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허름한 집에서 장사하는 게 재미있다고 했다. 손님 없을 땐 남편이 밭에서 키운 채소로 반찬 만드는 게 일이다. 음식에 화학조미료는 당연히 안 넣는다고 했다. 메뉴엔 없어도 손님이 부탁하면 할 수 있는 음식은 바로 옆 농협 마트에서 사다 해준다.

가게는 하루도 쉬지 않는다. 명절에도 오전 11시쯤 문을 연다. 그러면 객지에서 갈 곳 없어 하던 누군가가 반갑게 찾아온다. 보통은 아침 9시쯤 시작해 문 닫는 시간은 손님 봐가며 대중없다. 가게 열어둔 채 볼일 보러 비운 사이에도 손님들은 반찬과 술을 꺼내 먹고는 그릇으로 돈을 눌러놓고 간다. 누가 얼마큼 먹고 갔다는 쪽지를 남기기도 한다.

이 집 음식은 별미(別味)일망정 화려한 진미(珍味)는 아니다. 반찬도 수수하다. 하지만 어떤 현란한 요리도 흉내 내지 못할 편안함과 아련함이 있다. 밥상, 술상을 받으면 미소부터 솟는다. 사라져 가는 것들은 아름답다. 다음에 가면 국물이 뽀얗게 우러나도록 고아낸 돼지 족탕과 족찜을 먹어봐야겠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