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길은 길을 만든다. 남다른 역사와 의미를 지닌 길은 더하다. 누군가의 숨결 혹은 그가 겪고 견뎠을 일들이 가슴을 파고드는 순간 헝클어졌던 생각은 정리되고 사라진 듯하던 삶의 길 또한 드러난다. 서울 중구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만리동 손기정공원으로 이어지는 길도 그렇다.
참혹한 세월을 보내야 했던 이들의 영혼이 주는 치유력일까. 믿음을 지키느라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 금메달을 목에 걸고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려 애쓴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씨의 자취를 따라가는 동안 부서질 것 같던 마음은 가라앉고 없던 기운도 솟는다.
약현성당은 1892년 서소문 밖 순교지 언덕에 세워진 국내 최초의 성당. 한국경제신문사 옆(정문 오른쪽 100m) 입구를 지나 성당에 이르는 길은 곧장 올라가는 넓고 가파른 차로와 왼쪽의 야트막한 기도동산 속 오솔길 등 두 가지. 오솔길에선 예수의 마지막 모습을 14개의 조각에 담아낸 입석이 오가는 이들을 맞는다.
묵상처를 따라 기도동산을 걷다 보면 조선조 말 가톨릭 박해로 숨진 이들을 기린 서소문 순교자 현양탑이 나오고, 곧이어 작지만 아름다운 본당과 순교자기념관 및 순교성지전시관이 나타난다.
성당 건너편 옛 양정고등학교 자리에 조성된 손기정 공원에서 손씨의 얼굴상과 손씨가 히틀러로부터 받았다는 월계관기념수, 양정중고교 교지(校趾)기념비를 보고 언덕 꼭대기까지 올랐다 내려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40분. 무심코 다니면 꼬불꼬불한 산책로에 불과하지만 알고 보면 1800년대 말 이후 이 땅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역사탐방로다.
새 길 못지 않게 선인들의 흔적이 남은 옛길도 필요하다 싶었을까. 경기도가 수원· 화성· 오산시를 아우르는 역사문화탐방로를 만든다는 소식이다. 정조가 사도세자 묘(융릉)를 찾아가던 능행차길과 정조 승하 뒤 정약용이 귀양지로 향하던 삼남대로를 복원한다는 것이다.
구간은 북수원 끝 지지대고개부터 오산과 평택의 경계점까지 총 64㎞. 능행차길에 서면 정조의 아픔이, 삼남대로를 따라가다 보면 다산의 회한이 그대로 전해질지 모른다. 역사는 앞서간 이들의 궤적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주위의 옛길만 둘러봐도 앞으로만 내닫느라 헉헉거리는 데서 벗어나 숨을 가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끼며, 느끼는 만큼 깨닫는다. 역사 탐방이 필요한 이유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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