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나무 한 잎
- 이재윤(1955~ ) -
쓸쓸한 것은 가을만이 아니다
제 무게만큼 버티다가
제만큼의 눈에 쌓여
함께 떨어지게 될 모과나무 한 잎
돌계단에 앉아
가을이 쓸쓸하다는 이야기는
아직 이른 답변을 요구한다고
동짓날 모과나무 한 잎은
달빛에 몸 드러내고 있다
다만 견디어 낼 일이다
몸 지운 자리
순 틔우기까지
날짜 넘어가는 건 지나쳐도, 해 길고 짧아지는 건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여름부터 조금씩 짧아지던 낮이 그 끝에 닿았다. 동짓날은 짧아지는 낮의 끝이 아니라, 길어지는 낮의 시작이다. 이제부터 앙상한 가지에 새움 돋울 봄으로 천천히 다가서라고 태양이 나무에게 건네는 은밀한 신호다. 움츠러든 가지 위의 순 틔울 자리가 말갛게 부풀어 오른다. 제 몸을 일으키기 위해 하릴없이 견뎌야 하는 생명의 통점이다. 알고 보면 살아간다는 건 한결같이 고통이고 고독이다. 빈 가지에 오도카니 매달린 잎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그렇다. 하얀 겨울에 나무가 홀로 고통스럽게 일으키는 생명의 노래가 차갑지만 한없이 뜨겁다. <고규홍·나무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