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코리안 루트
해발 5000m에선 공기중 산소가 평지의 절반,8000m에선 3분의 1 수준이다. 기압도 뚝 떨어진다. 실명이나 집중력 저하,뇌수종에 걸릴 위험이 급격히 높아진다. 그래서 스위스 의사 앙리 뒤낭(1828~1910년)은 7500m 이상을 '죽음의 지대'라고 불렀다. 이 선을 넘으면 생리적 한계에 부닥쳐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고 봤다.
이를 깬 사람은 이탈리아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다. 산소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경비행기로 에베레스트 위를 날아본 뒤 산소통 없이 등반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1978년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다. 1970년부터 16년에 걸쳐 히말라야의 8000m 이상 14좌(座)를 사상 처음 모두 오르는 기록도 세웠다. 그 중 6좌가 무산소 등정이었다. 메스너 이후 단순히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표인 등정(登頂)주의는 시들해 졌다.
이젠 어떤 루트를 어떤 방법으로 올랐느냐를 따지는 등로(登路)주의 시대다. 산소통이나 셰르파의 도움을 받지 않는 무산소 단독 등반,새로운 루트 개척,능선보다 벽,우회보다 직선 등정을 높이 친다. 자연의 불확실성에 맞서는 상황으로 스스로를 던지는 셈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등산이 시작된다'고 했던 19세기 영국 등반가 앨버트 프레드릭 머머리의 정신과도 통한다.
안나푸르나 등반 중 실종된 박영석 대장도 등로주의 산악인이다.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그는 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미답의 길을 냈다. 첫 '코리안 루트'다. 이번 안나푸르나 남벽에서도 또 하나의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려다 사고를 당했다. 이곳은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수직 고도가 3000m에 이를 만큼 험하다. 그는 중간 캠프를 설치하지 않고 벽에 매달려 잠을 자면서 정상까지 치고 올라가는 알파인 스타일을 시도했다.
"자연에 도전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도전하는 겁니다. 나이 먹고 몸은 지쳤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자는 거지요. " 그가 안나푸르나로 가기 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메스너가 "나는 산을 정복하려고 이 곳에 온 게 아니다. 영웅이 되기 위해서도 아니다. 두려움을 통해 이 세계를 새롭게 알고 싶고 느끼고 싶다"고 한 것과 비슷한 의미였을 게다. 3일 박 대장과 신동민 · 강기석 대원의 합동영결식이 산악인장으로 열렸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찾아내려던 그들이 산의 품에서 편히 잠들기 바란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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