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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김쟁쟁(川金錚錚) 하류청청(河柳靑靑)

라이프(life)/풍수지리

by 굴재사람 2010. 1. 4.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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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천김쟁쟁(川金錚錚) 하류청청(河柳靑靑)

 

조선왕조 500년 동안 지역차별을 많이 받았던 곳은 이북지역이다. 실력이 있어도 출세를 할 수가 없었다. 이북에서 발생한 이시애의 난, 홍경래의 난 등은 그러한 불평등에 대한 이북사람들의 저항이었다. 이북에 이렇다 할 큰 벼슬을 한 집안이 별로 없다 보니 이북으로 올라간 이남 출신 관리들의 착취를 견제할 세력도 드물었다.

500년 동안 쌓인 이북 사람들의 한을 풀어준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주님 앞에 양반 상놈 없다'고 선언한 기독교이고, 또 하나는 '상놈에게 땅도 똑같이 나누어 준다'를 모토로 한 공산주의였다. 우리가 남북분단이라는 엄청난 현실을 진정으로 해소하려고 한다면 조선조 500년 동안 진행됐던 이런 인과(因果)의 축적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북 다음으로 차별을 받았던 지역은 영남이다. 남인(南人)들이 서울의 주류사회에서 축출되기 시작한 숙종조 말엽부터 계산하면 대략 200년 동안 영남의 남인들은 극심한 차별을 당했다. 집권당인 노론의 탄압으로 인해서 정3품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고위직에는 갈 수가 없었다. 필자가 영남 남인들의 본거지인 안동의 유서 깊은 명문가들과 교류하면서 놀란 사실은 그 택호(宅號)였다. 충청도에 가면 무슨 무슨 '정승댁' '대감댁'이 많은데, 안동에는 '교리댁' '정언댁' '장령댁' '승지댁'이 많았다.

'교리(校理)' '정언(正言)' '장령(掌令)'은 중앙부처 과장급 정도의 벼슬이다. 안동이라면 양반의 도시이고, 벼슬이 화려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막상 명문가 후손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안동에는 고위벼슬이 없다시피 했다. 안동 남인들은 그 세월을 200년이나 견디어야 했다. 벼슬도 없고 돈도 없고 물산도 부족한 산골 지역에서 양반의 품위를 지키려고 몸부림친 사람들이 안동사람들이다.

노론 출신 풍운아인 김가진(金嘉鎭·1846~ 1922)이 안동 인심을 달래려고 안동부사로 내려갔다가 중앙정부에 올린 보고서에는 '천김쟁쟁(川金錚錚) 하류청청(河柳靑靑)'이라고 되어 있다. 안동의 명문가인 '내(川) 앞의 김씨들은 쇳소리만 나고, 하회의 류씨들은 푸르기만 하다'는 뜻이다. 설득하지 못했다는 표현이다. 사회(지역) 통합은 이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에 각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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