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낙기대(樂飢臺)

라이프(life)/풍수지리

by 굴재사람 2009. 12. 3. 20:10

본문

[조용헌 살롱] 낙기대(樂飢臺)

 

20091022-59.jpg

 

'대(臺)’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언덕 위의 ‘높고 평평한 곳’을 가리킨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 두들 마을의 지세는 특이하다. 아래에서 쳐다보면 5·5m 높이의 바위언덕 위에 있는데, 막상 위에 올라가면 평평한 지형이 넓게 형성되어 있다. 동네 전체가 언덕 위에 올라앉아 있는 형국이다.

 

이 두들 마을 입구 오른쪽 바위벽에는 樂飢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바로 ‘낙기대’이다. ‘배고픔을 즐기는 대’라는 뜻이다. 필자는 우리나라 조선 팔도의 유명한 정자와 누각, 그리고 대(臺)를 구경하고 다녔지만, ‘낙기대’라는 이름은 처음 접했다. 다른 좋은 말도 많고 많은데, 왜 하필이면 ‘배고픔을 즐긴다’는 작명을 했을까! 얼마나 배가 고팠단 말인가! 이 동네는 대략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재령이씨(載寧李氏)들의 세거지(世居地)이다.

 

재령이씨는 조선 후기 당쟁사를 놓고 볼 때 가장 탄압을 많이 받았던 집안에 속한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석보면 두들 마을 출신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 때문이다. 갈암은 17세기 말의 영남학파(嶺南學派)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17세기 말은 조선조에서 당쟁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숙종 말엽이다. 경신환국(庚申換局), 기사환국(己巳換局), 갑술환국(甲戌換局) 같은 정변이 몰려 있는 시기이다. 기호학파 노론(老論)과 영남학파 남인(南人)의 승부였다.

 

이 시기 남인의 대표주자가 바로 갈암이었다. 갈암은 기호학파와 기호학파의 종장이었던 우암 송시열에게 정면승부를 걸었다 패배했다. 자기 목숨뿐만 아니라 집안 전체의 운명을 건 승부였다. 갈암이 당쟁에서 패한 뒤 재령이씨들은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과거시험장에서 재령이씨 수험생들은 노론 시험관들로부터 ‘제리(除李)’라고 불렸다. “재령이씨는 제외한다”는 뜻이다. 재령이씨들은 이후 아예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벼슬 자체가 원천적으로 봉쇄됐기 때문이다. 산골이라 논밭도 없고 녹봉도 없으니 그저 굶을 수밖에 없었다. 현 정권을 강하게 비판하는 이문열씨도 두들 마을의 ‘재령이씨’가 아닌가!

 

'라이프(life) > 풍수지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아름다운 절 숲들이  (0) 2010.01.06
천김쟁쟁(川金錚錚) 하류청청(河柳靑靑)  (0) 2010.01.04
墓地 박물관   (0) 2009.12.02
'천석(川石)'론(論)   (0) 2009.12.01
'금강산'고(考)   (0) 2009.11.29

관련글 더보기